얼(뿌리를 찾아서)/홍익인간 7만년 역사

[홍익인간 287] 북부여-후삼한 시대 위씨조선(衛氏朝鮮) 연대기

양해천 2018. 1. 22. 13:01

[홍익인간 287] 북부여-후삼한 시대 위씨조선(衛氏朝鮮) 연대기

2012년 04월 19일 (목) 06:57:44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제1대 위만왕(衛滿王:서기전194년~?)] 

<위만의 망명> 

서기전195년 병오년(丙午年)에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한(漢)나라를 배반하고 흉노(匈奴)로 망명하니, 그의 무리인 위만(衛滿)은 북부여에 망명을 요구하였으나 해모수(解慕漱) 천왕께서 이를 허락하지 않으셨는데, 천왕께서 병으로 인하여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번조선왕(番朝鮮王) 기준(箕準)이 크게 실수하여 마침내 위만을 박사로 모시고 패수(浿水) 건너 상하운장(上下雲障)을 떼어서 위만에게 봉해 주었다. 

여기서 노관이 왕으로 있던 연나라는 유방(劉邦)이 세운 한(漢)나라의 제후국이며, 이때는 제2대 혜제(惠帝) 1년이 된다. 

흉노족은 서기전121년에 혼사왕과 휴도왕이 무리를 이끌고 한무제에게 항복하려 하다가 혼사왕(混邪王)이 휴도왕(休屠王)을 죽이는 일이 발생하였는데, 이때 휴도왕의 태자이던 김일제(金日磾)가 항복하여 한나라로부터 산동지역에 투후(秺侯)로 봉해졌으며, 후대에 이 김일제 일족의 후예들이 한(漢)나라와 왕망(王芒)의 신(新)나라와의 교체 혼란기에 한반도의 남부지역으로 대거 이동하여 변한을 이어 서기42년에 가야(伽倻)를 세우게 되는 것이다. 

기준왕은 번조선의 마지막 왕이 되는데, 서기전194년에 위만에게 속아 나라를 빼앗기고 배를 타고 한반도의 평양에 도착하였으나, 토착인의 저항에 부딪혀 다시 남하하여 서남쪽의 금마(金馬:益山)에 정착하여 마한왕(馬韓王)이 되었던 것이며, 1년만인 서기전193년에 붕(崩)하고 중마한(中馬韓)이 되는 월지(月支:目支의 오기)인 직산(稷山)에 정착한 번조선 출신의 상장군(上將軍) 탁(卓)이 대를 이어 마한왕이 되어 대대로 한반도 삼한(三韓)의 종주(宗主)가 되어 진왕(辰王)이라 불렸던 것이다. 

상하운장은 서기전195년경에 번조선의 서쪽 변경 지역에 있던 방어기지로서 당시 패수(浿水)이던 지금의 난하(灤河) 중하류 지역의 바로 동쪽에 남북(南北:上下)의 두군데로 나뉘어져 위치하였던 것이 된다. 

<위만의 번조선 탈취> 

서기전194년 정미년(丁未年)에 위만이 번조선왕 기준을 호위한다 속이고 군사를 이끌고 험독(險瀆)을 공격하니, 기준왕이 패하여 바다로 배를 타고 들어가 돌아오지 못하였다. 

험독은 당시 번조선의 수도로서 난하의 동쪽에 위치하여 번조선 오덕지(五德地)인 5경(京)의 하나로서 지금의 산해관(山海關) 자리가 분명하다. 험독을 비롯한 번조선의 다섯 곳의 수도를 왕검성(王儉城:왕험성은 오기)이라 부른다. 

기준왕이 바다로 배를 타고 들어가 돌아오지 못하였다 하는 것은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겨 도로 찾지 못하고 한반도로 망명한 것을 나타낸다. 

[제2대 차왕(次王:?~?)] 

차왕의 이름과 사망연도가 불명이다. 

[제3대 우거왕(右渠王:?~서기전108년)] 

<북부여에게 남여성을 잃다> 

서기전128년 계축년(癸丑年)에 북부여 제3대 고해사(高奚斯) 천왕이 몸소 보병(步兵)과 기병(騎兵) 만명을 이끌고 위씨의 도적들을 공격하여 남여성(南閭城)에서 쳐부수고 관리를 두었다. 

<예왕 남여가 우거왕을 배반하다> 

서기전128년 예왕(濊王) 남여(南閭) 등이 우거를 배반하고 28만명을 데리고 한나라의 요동(遼東)으로 와서 소속되자 한무제(漢武帝)는 그 땅을 창해군(蒼海郡)으로 삼았다가 몇 해 뒤에 없앴다. 

이때 예왕 남여의 예(濊)라는 국명 또는 지명은 번조선 부근에 있던 것이며, 백두산의 동쪽지역이나 한반도 동북에 위치하였던 예(濊)가 아니다. 예(濊)는 바다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되는데, 곧 서기전128년에 북부여가 번조선 영역이 되는 남여성(南閭城)을 공격하여 빼앗자 이때 남여성의 성주 또는 왕이 무리들을 대거 이끌고 번조선 영역을 떠나 한(漢)나라에 붙은 것이 되고, 이를 남여 등이 우거왕을 배반하였다 기록한 것이 된다. 

남여성은 번조선과 북부여의 사이에 있던 성(城)이 되는데, 발해만 가까이에 있는 것이 되어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이던 진번(眞番) 땅의 남쪽이나 진번의 남쪽 지역이 되는 임둔(臨屯)지역에 있었던 것이 된다. 그래서 예왕이라 기록된 남여성의 성주가 28만의 무리를 이끌고 번조선 영역을 떠나 서쪽으로 패수인 난하를 건너 한나라의 요동군 땅으로 들어간 것이 된다. 

창해군은 한나라 요동군 땅의 남쪽에 해당하는 지역으로서 대요수(大遼水)이던 지금의 영정하(永定河)와 패수(浿水)이던 난하(灤河) 사이로 발해만 유역에 위치한 것이 된다. 

<북부여의 해성(海城) 이북 50리를 탈취하다> 

서기전118년 계해년(癸亥年)에 우거왕의 군사들이 북부여에 대거 침략하니 북부여 군대가 크게 패하여 해성 이북의 50리의 땅이 모두 우거왕의 땅이 되었다. 

이때 위씨조선의 세력이 강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상대적으로 북부여의 국력은 쇠퇴하여 있었던 것이 된다. 

<해성(海城)을 지키다> 

서기전117년 갑자년(甲子年)에 북부여가 장군을 보내 해성(海城)을 공격해 왔으나 석달이 걸려도 이기지 못하였다. 

<북부여에게 해성을 도로 내주다> 

서기전115년 북부여 제4대 고우루(鼓于婁) 천왕이 몸소 정예군 5,000을 이끌고 습격하여 해성(海城)을 격파하고 살수(薩水)에 이르르니, 구려하(九黎河) 동쪽이 모두 북부여에 항복하였다. 

해성은 말기 단군조선의 수도이던 장당경인 지금의 심양 남쪽에 위치한 땅으로서 이궁을 둔 곳으로 당시 평양(平壤)이라 불렀다. 

살수는 한반도의 청천강이 아니라 장당경(藏唐京:심양) 남쪽에 위치한 해성(海城) 부근인 지금의 요동반도 내에서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강이며, 고구려 을지문덕 대모달이 살수대첩을 펼친 곳이다. 

구려하(九黎河)는 서압록(西鴨綠)이었던 지금의 서요하(西遼河)의 상류지역에 위치한 여러 갈래의 강을 가리키며,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이던 구려(句麗)의 동부지역에 위치한 지금의 적봉(赤峯)을 포함한 지역에 위치한 강이 된다. 단군조선의 구려국(句麗國)은 서쪽으로는 소요수(小遼水)가 되는 지금의 청수하(淸水河)를 건너 대요수가 되는 지금의 영정하 최상류 지역에 위치한 대동(大同)으로부터 동쪽으로는 지금의 적봉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으로서, 단군조선의 영역으로 볼 때 동서(東西)의 중앙에 해당하는 지역이 된다. 

이리하여 당시 북부여가 위씨조선에 잃었던 남여성과 해성을 수복하고 서쪽으로 나아가 구려하 지역까지 수복한 것이 된다. 

<한나라 사신 섭하가 우거왕의 비왕 장을 죽이다> 

서기전109년 한(漢)나라 사신 섭하(涉何)가 우거왕을 찾아와 한무제의 조서를 내렸으나 우거왕이 이를 거절하므로, 섭하는 국경 근처로 가서 패수에 임하여, 자신을 따라온 부하에게 시켜 마중 나온 위씨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을 죽인 다음, 바로 달려서 새방(塞方)으로 들어갔다. 

위씨조선의 제도에 비왕(裨王)을 둔 것이 되는데, 이는 단군조선의 한(韓) 또는 비왕(裨王) 제도를 답습한 것이 된다. 

이때 한나라는 국경이던 패수까지 장성(長城)을 쌓은 것이 아니며, 새(塞)인 성채(城砦)를 구축한 것이 된다. 또 패수이던 지금의 난하를 건너 산해관까지 이어지는 장성은 서기전109년을 지난 후대에 세워진 것이 된다. 

<위씨조선이 요동 동부도위 섭하를 죽이다> 

서기전109년 한나라 무제는 섭하를 요동 동부도위로 삼았는데, 위씨조선은 군사를 내어 섭하를 공격하여 죽였다. 

한나라의 요동은 지금의 난하 서쪽에 설치된 군(郡)이며, 위씨조선의 우거왕이 군사를 보내어 난하를 건너서 섭하를 공격하여 죽인 것이 된다. 

<한나라 누선장군 양복과 좌장군 순체가 위씨조선 공격에 실패하다> 

서기전109년 가을에 한무제는 누선장군 양복을 보내어 제(齊)나라로부터 발해를 건너게 하고 군사 5만을 거느리게 하였다. 또, 좌장군 순체(荀彘)는 요동으로 나와 우거를 치니, 우거도 군사를 내어 함한 곳에서 이를 막았고, 이에 순체의 군사들이 패하여 흩어지니 도망하여 돌아간 자가 많았는데, 이들은 모두 법으로 다스려 죽였다. 

누선장군 양복은 제나라 군사 7천명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성에 이르니 우거가 성을 지키고 있었으며, 우거가 누선장군의 군사가 적은 것을 탐지하고, 곧 성에서 나와 누선장군의 군사를 습격하자 패하여 흩어졌다. 

누선장군 양복은 군사들을 잃고 산속으로 들어가 숨은지 10여일만에 차츰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여 다시 모이게 하였다. 

좌장군 순체도 위씨조선의 패수(浿水) 서쪽의 군사를 쳤으나 깨치고 나가지는 못하였다. 

<한무제가 위산을 위씨조선에 사신으로 보내다> 

한무제는 누선장군 양복과 좌장군 순체가 모두 전쟁에 이롭지 못하자 하여 위산(衛山)을 시켜 군사의 위엄을 보이고 가서 우거왕을 타이르게 하였다. 이에 우거왕이 항복하겠다 하면서 태자를 보내었고, 이때 태자는 말 5,000필과 군량과 군사 만여명이 모두 병기를 지니고 패수를 건너려 하였는데, 사자 위산과 좌장군 순체는 의심하여 태자에게 병기를 갖지 말게 하라 하였다. 

이때, 태자는 역시 사자 위산과 좌장군 순체가 자기를 속여 죽이지 않을까 의심하여 드디어 패수를 건너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 가버렸다. 

<한무제가 위산을 처형하다> 

이에 사자 위산은 한무제에게 가서 이를 보고하자 한무제는 책임을 물어 위산을 참수하였다. 

<우거왕의 수성(守城) 작전> 

좌장군 순체는 패수 위의 군사를 격파하고 앞으로 성 밑에 나가 그 서북쪽을 포위하고 누선장군 양복도 역시 가서 성 남쪽을 점령하자 우거는 하는 수 없이 굳게 성을 지키니 여러 달이 되어도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한무제가 제남태수 공손수를 파견하다> 

한무제는 좌장군 순체와 누선장군 양복이 우거왕의 성을 포위하고 있으나 서로 생각을 달리하고 있어 어떻게 할지 결정짓지 못하므로 이에 제난태수 공손수를 보내어 일을 바로 잡도록 하였다. 

<한무제가 공손수를 벌하다> 

공손수는, “누선장군이 위씨조선의 항복을 약속받았으나 만나주지 않아 항복을 받지 못한 것이다, 누선장군이 변을 일으키는 것만이 아니라 조선과 함께 군사를 합쳐 우리를 멸할 것이다”라고 하는 좌장군 순체의 말을 믿고서, 누선장군 양복을 체포하고, 누선장군의 군사를 좌장군이 군사에 합친 후, 이를 한무제에게 보고하니, 한무제는 공손수를 벌하였다. 

<위씨조선의 대신들이 항복하다> 

좌장군 순체는 합친 군사로써 조선을 급히 치기 시작하였다. 이에 위씨조선의 정승 노인, 정승 한도, 니계상 삼, 장군 왕협이 서로 의논한 후 항복하기로 하였고, 노인, 한도, 협은 도망하여 한나라에 항복하였는데, 노인은 도중에서 죽었다. 

<위씨조선이 망하다> 

서기전108년 여름에 위씨조선의 니계상 삼은 사람을 시켜 우거왕을 죽이고 한나라에 항복했다. 

그러나, 왕검성은 함락되지 않았는데, 좌장군 순체는 우거왕의 아들 장(長)과 항복한 정승 노인의 아들 최(崔)를 시켜 대신(大臣) 성기(成己)를 죽이니 위씨조선이 이에 완전히 망하였다. 

[한무제가 위씨조선의 대신들을 제후로 봉하다] 

이에 한나라는 사군(四郡)을 만들고, 니계상이던 삼은 회청후에 봉하고, 정승이던 한도는 추저후에 봉하고, 장군이던 왕협은 평주후에 봉하고, 우거왕의 아들 장(長)은 기후(幾侯)에 봉하고, 죽은 노인의 아들 최는 온양후에 봉하였다. 

[한무제가 순체와 양복을 벌하다] 

한무제는 좌장군 순체를 불러 들여 모든 계획을 잘못 한 죄를 물어 기시(棄市)의 형에 처했고, 누선장군 양복은 서인(庶人)으로 폐하였다. 

이로써 한무제의 사람으로서 사신 섭하는 위씨조선에 의하여 살해되었고, 좌장군 순체는 한무제로부터 기시의 형을 받았으며, 누선장군 양복은 강등되어 서인이 되었고, 사신 위산은 처형을 당하였으며, 제남태수 공손수도 처벌을 받았는 바, 아무도 제후로 봉해지지 못하였다. 

[북부여 졸본 출신의 동명왕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키다] 

서기전108년 위씨조선이 한나라에 망하자 땅을 수복하기 위하여 북부여 졸본 출신의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 침략군과 전쟁하며 연파하였다. 이에 그 지방의 백성들 모두가 사방에서 일어나 호응함으로써 싸우는 군사를 도와서 크게 떨쳐 보답하였다. 

[소위 한사군 문제] 

서기전108년에 한(漢)나라는 위씨조선을 멸망시키고 위씨조선의 땅에 소위 한사군을 설치하였는데, 한사군은 낙랑군(樂浪郡), 현도군(玄ꟙ郡), 진번군(眞番郡), 임둔군(臨屯郡)이다. 

낙랑군은 서기전108년에 설치하고 현도군은 서기전107년에 설치하였으며, 진번군과 임둔군은 언제 설치된 것인지 명백한 기록이 없으나 서기전108년에 낙랑군과 함께 설치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런데, 서기전108년에 북부여의 졸본한(卒本汗)이던 고두막(高豆莫)이 동명왕(東明王)이라 칭하며 의병을 일으켜 북부여를 부흥시키려 다물업(多勿業)을 열었는데, 이때 소위 한사군의 단군조선 유민들이 호응하였다. 그리하여 소위 한사군은 사실상 유민들의 자치가 행해졌던 것이 되며, 고두막한은 서안평까지 진출하여 단군조선의 구려 땅을 수복하였던 것이다. 

낙랑군은 지금의 난하 중류 지역의 동서에 걸치며 서쪽으로 고하 부근까지가 되고 낙랑군의 서북지역으로서 구려의 남부지역이 현도군이 되며, 진번군은 낙랑의 동쪽으로 지금의 요하 서쪽 사이 땅이 되고, 임둔군은 진번군의 남쪽으로 발해만 유역이 된다. 

이후 서기전82년에 진번군과 임둔군을 낙랑과 현도에 붙였다라고 고대중국의 기록에서 적고 있으나 이는 춘추필법에 의한 역사은닉으로서 실제로는 이때 진번과 임둔은 고두막(高豆莫) 천왕의 북부여에 수복된 것이 된다. 이는 서기전42년에 졸본에서 독립하려고 북부여를 떠나 진번(眞番)의 패대(浿帶)지역으로 간 소서노(召西弩)가 땅을 개척하여 나라를 열어 고구려 고주몽 성제로부터 어하라국(於瑕羅國)으로 봉해진 것으로 보아 드러나는 사실이 된다. 

패대지역의 패(浿)는 패수를 대(帶)는 대수를 가리키는데, 패수(浿水)는 곧 지금의 난하(灤河)를 가리키고, 대수(帶水)는 지금의 요하 중하류지역에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 합류하는 강이 된다. 즉, 어하라국은 패수의 동쪽으로 진번 땅을 포함하며 나라의 중심지는 대수(帶水) 남쪽으로 지금의 요동반도 중남부지역으로서 지름500리의 땅이 된다. 

소위 한사군 중 낙랑군과 현도군은 서기313년에 고구려의 미천제(美川帝)에 의하여 낙랑군과 서기204년에 낙랑군에서 분리되어 설치된 대방군이 완전히 축출되고, 현도군도 정벌 당하여 이후 고구려의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소위 한사군의 지명과 위치 및 생몰 등의 문제에 대하여 뒤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 
[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사무총장.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동안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1. 홍익인간(弘益人間) 천부(天符)의 역사는 마고성(麻姑城:파미르고원)의 마고(麻姑)시대인 서기전70378년 계해년(癸亥年)부터 시작되었음을 최초로 밝혔음. 
2. 역법(曆法)이 시작된 해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585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3. 황궁씨를 이은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다는 것임을 밝혔음. 
4.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무한조화순환역(無限造化循環易), 음양오행(陰陽五行), 태양태음성력(太陽太陰星曆), 단군조선의 정치행정 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배달나라 시대의 음양오행수리역(陰陽五行數理易)이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5.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히고,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으며,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에게 제(祭)를 올리는 권한을 가진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있었던 당요(唐堯)의 전란(戰亂)으로 인한 단군왕검(檀君王儉)의 동북 아사달로의 이동과정임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천자로 불리는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의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인 천자(天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우 치수기념 부루공덕 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여, 서기전2267년 이후 우(禹)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겨 남악(南嶽) 형산(衡山)에 세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추장(酋長)의 후손임을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최초 해독학자 허대동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 해독의 검증에 참여하여 첨수도(尖首刀),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상형 및 표음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

천산(天山)의 다른기사 보기
ⓒ 데일리전북(http://www.dailyjeonbuk.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