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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 320] 사국(四國) 시대 백제(百濟) 연대기 2

양해천 2018. 1. 23. 12:57

[홍익인간 320] 사국(四國) 시대 백제(百濟) 연대기 2

2012년 05월 19일 (토) 09:43:53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2. 제2대 다루왕(서기28년~서기77년) 

온조왕의 태자 다루가 즉위하였다. 

서기29년에 동명묘(고주몽 동명성제묘)를 배알하였다. 

서기30년에 말갈과 전쟁을 하여 동부의 흘우와 고목성의 곤우가 대승하였다. 

서기31년에 말갈과 전쟁을 하였다. 

서기34년에 말갈이 침입하였다. 

서기55년에 말갈이 침입하였다. 

서기63년에 낭자곡성까지 국토를 넓혔다. 

서기64년에 백제가 신라의 와산성을 쳤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구양성을 쳤는데, 신라군의 역습으로 패하여 달아났다. 

서기65년에 백제가 신라의 와산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다시 신라의 공격으로 와산성을 빼앗겼다가 되찾고 다시 빼앗겼다. 

3. 제3대 기루왕(서기77년~서기128년) 

다루왕의 태자로 즉위였다. 

서기125년에 신라가 말갈의 침입을 받아 구원을 요청하여 백제가 지원군을 보내었다. 

4. 제4대 개루왕(서기128년~서기166년) 

기루왕의 태자로 즉위하였다. 

서기132년에 북한산성을 쌓았다. 이때 한강 이북을 확보한 것이 된다. 

서기165년에 신라 이찬 길선(吉宣)이 신라 아달라왕 때 백제로 망명하였다. 이에 백제가 돌려보내 주지 않자 신라가 백제를 침공하였는데, 신라군이 군량이 떨어져 돌아갔다. 

5. 제5대 초고왕(서기166년~서기214년) 

개루왕의 태자로 즉위하였다. 

서기167년에 백제가 은밀히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서쪽 변경의 두개의 성을 공격하여 남녀 1천여명의 포로를 잡아왔다. 이에 신라의 아달라왕이 일길찬 흥선에게 2만8천여명의 군사를 주어 한수에 이르렀는데 백제는 포로들을 돌려 주었다. 

서기190년에 백제군이 부곡성을 포위하였다가 신라의 장군 구도가 막아서자 달아났다. 이에 신라군이 아산성까지 쫓아갔으나 유인책에 말렸다. 

서기204년에 백제는 신라의 요거성을 함락시켰다. 

서기214년에 백제가 말갈의 석문성을 빼앗았으나, 말갈 기병의 역습으로 술천(여주)까지 밀렸다. 

6. 제6대 구수왕(須:서기214년~서기234년) 

초고왕의 태자로 즉위하였다. 

서기216년에 말갈이 침입하였다. 

서기217년에 동명묘에 기우제를 지냈다. 

서기229년에 말갈이 침입하였다. 

7. 제7대 사반왕(서기234년) 

구수왕의 태자로 즉위하였다. 

8. 제8대 고이왕(234~286) 

초고왕의 아우이자 사반왕의 종조부인 고이가 즉위하였다. 

서기236년에 고이왕이 서해의 큰 섬으로 사냥을 갔다가 40여마리의 사슴을 잡았다. 

서기240년에 진충을 좌장에 임명하여 군사일을 맡겼다. 가을에 석천에서 대규모의 군대 사열식을 가졌다. 

서기246년에 위나라의 유주자사 관구검이 낙랑과 함께 고구려를 정벌할 때, 백제는 발해만 유역의 낙랑(군)을 습격하여 영토를 넓혔다. 

대동강 평양의 낙랑은 이미 서기37년에 망하여 고구려에 편입되었던 것이며, 여기 낙랑은 서기313년까지 존속하던 발해만 유역의 낙랑을 가리킨다. 즉 백제는 비류의 어하라(진번) 백제가 온조백제에 합쳐진 이후로서 발해만 유역에 백제 땅의 근거지를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 되며, 한(漢)나라 말기인 서기180년경부터 고구려와 함께 발해만 유역의 낙랑군 등의 지역을 공략하기 시작하였으며, 근초고왕 때 이르러 서기313년에 고구려에 의하여 소멸된 대방군 땅을 차지하고 요서지역과 산동지역, 왜(일본)지역을 확보하였던 것이 된다. 백제의 요서군, 진평군은 지금의 난하 유역의 서쪽으로 산동지역까지 발해만 유역에 걸쳐 있는 것이 된다. 

고이왕이 신라와 말갈을 공격하여 영토를 넓혔다. 말갈추장이 말 10필을 바쳤다. 

서기247년에 왜 땅의 신공여왕의 야마대국이 구노국(拘奴國)과의 불화로 전쟁하였으며, 신공왕후가 죽고 남자가 왕이 되었으나 반란이 일어나 나라가 시끄러워 다시 신공왕후의 종실 여자인 대여(臺與)가 여왕으로 세워졌다. 

서기260년에 6좌평, 16관등과 관복을 제정하고, 율령을 반포하였다. 

서기261년에 정사를 보는 남당(南堂)을 설치하였다. 

서기262년에 법령을 제정하였다. 

서기270년에 왜에 다시 남자 왕인 응신왕(應神王)이 섰다. 백제가 응신왕을 세웠다라고도 한다. 

고이왕은 대방왕의 딸을 며느리로 삼았다. 여기 대방은 서기204년에 공손강이 설치하였던 군으로 발해만 유역의 낙랑 남쪽에 있으며, 백제가 대방군을 원조하였다. 

신라가 화친을 거절하자 신라의 변경을 자주 침공하였다. 

서기286년에 백제가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다. 

서기286년 11월에 고이왕이 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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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사무총장.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동안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1. 홍익인간(弘益人間) 천부(天符)의 역사는 마고성(麻姑城:파미르고원)의 마고(麻姑)시대인 서기전70378년 계해년(癸亥年)부터 시작되었음을 최초로 밝혔음. 
2. 역법(曆法)이 시작된 해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585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3. 황궁씨를 이은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다는 것임을 밝혔음. 
4.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무한조화순환역(無限造化循環易), 음양오행(陰陽五行), 태양태음성력(太陽太陰星曆), 단군조선의 정치행정 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배달나라 시대의 음양오행수리역(陰陽五行數理易)이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5.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히고,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으며,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에게 제(祭)를 올리는 권한을 가진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있었던 당요(唐堯)의 전란(戰亂)으로 인한 단군왕검(檀君王儉)의 동북 아사달로의 이동과정임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천자로 불리는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의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인 천자(天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우 치수기념 부루공덕 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여, 서기전2267년 이후 우(禹)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겨 남악(南嶽) 형산(衡山)에 세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추장(酋長)의 후손임을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최초 해독학자 허대동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 해독의 검증에 참여하여 첨수도(尖首刀),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상형 및 표음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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