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 319] 사국(四國) 시대 백제(百濟) 연대기 1
2012년 05월 18일 (금) 07:40:15 | 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
1. 제1대 온조왕(溫祚王:서기전18년~서기28년)
<온조의 출생>
서기전58년경에 북부여의 졸본(卒本)에서 온조(溫祚)가 고주몽(高朱蒙)과 소서노(召西弩) 사이에서 탄생하였다. 소서노는 북부여(졸본) 고무서(高無胥) 단군의 둘째 딸로서 동부여 해부루왕의 서손인 우태(于台)와 서기전65년경에 혼인하여 비류를 낳았고, 우태가 죽은 후 서기전59년에 고주몽과 재혼하여 서기전58년 이후에 온조를 낳았던 것이 된다. 고주몽에게는 동부여에서 서기전59년경 이전에 예씨(禮氏)부인에게서 얻은 유리(琉璃)가 있었다.
<진번백제(眞番百濟):어하라국>
서기42년에 온조는 어머니 소서노를 따라 이복형 비류(沸流)와 함께 아버지 고주몽이 단군으로 다스리던 북부여의 졸본(卒本)을 떠나 패대지역의 진번(眞番) 땅으로 가서 정착하였다.
비류와 온조는 고주몽의 적자가 아니므로 유리가 동부여에서 오게 되면 대를 이을 자격을 잃게 되므로 소서노가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독립한 것이 된다.
서기37년에 고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고구려를 세운 이유는 단군조선 땅의 동쪽에 위치한 부여라는 이름 대신에 단군조선 시대에 동서로 보아 나라의 중앙에 위치하였던 나라이면서 서기전1285년 이후에 고씨(高氏)가 다스렸던 구려(句麗:구리)를 회복하는 등 단군조선의 땅을 되찾기 위한 것인데, 고구려라는 국호는 다물정책(多勿政策)이 담겨진 국호가 된다. 서기전239년 4월 8일에 군사를 일으켜 서기전232년에 단군조선을 접수하였던 해모수는 곧 구려 출신으로서 부여(扶餘)에 수도를 두었던 것인데, 고주몽은 서쪽으로 구려를 회복한다는 의미에서 고(高:해)씨의 구려(句麗)라 한 것이 된다.
서기31년에 소서노가 고구려 고주몽 성제로부터 어하라(於瑕羅:어라하:백제말 王:어른:長)로 책봉되었다. 즉 소서노의 나라인 어하라국은 고구려의 제후국이 되는 것이다.
서기전19년에 소서노가 훙(薨)하자 비류가 장자로서 소서노의 대를 이어 즉위하여 어라하가 되었다. 이해에 고주몽 동명성제(東明聖帝)께서 붕하고 태자 유리가 제2대 고구려 태황(太皇)이 되었다.
<온조의 십제(十濟) 건국>
서기전18년 온조가 독립하기 위하여 어하라국(진번백제)을 떠나, 마한(馬韓) 땅의 미추홀(밑골:仁川)을 거쳐 한강을 따라 올라가서, 마한왕(馬韓王 제9대 계왕:稽王)으로부터 땅을 할양받아, 한산(漢山) 밑의 위지성(尉支城:河南 尉禮城)에서 십제(十濟)를 건국하였다.
<동명왕묘>
5월에 고주몽 성제를 모신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웠다. 이로써 온조왕의 아버지는 동명성제 고주몽이 분명하게 된다.
고주몽 성제 이전에 동명(東明)이라 칭한 인물이 북부여 시대에 졸본의 한(汗)으로서 서기전86년에 북부여 천왕(天王)이 되었던 고두막(高豆莫) 단군인데, 비류의 아버지가 되는 우태(于台)는 서기전86년에 동부여왕이 된 해부루의 서손(庶孫)으로서 고두막 천왕의 태자 고무서(高無胥)의 둘째 딸인 소서노와 혼인하였는 바, 온조왕이 고두막 천왕을 모신 것이라 보기에는 거리가 있게 된다.
<말갈 방비>
서기전17년에 울음이 우보를 맡아 병마를 관리하였다.
서기전16년 가을에 말갈이 침입하였으나 물리쳤다.
<흉년이 들다>
서기15년에 가뭄이 심하게 들고 전염병이 돌았다.
<낙랑과 수교>
서기전15년 가을에 낙랑과 수교하였다.
여기 낙랑은 지리적으로 한반도인 마한 땅의 대동강 유역에 있던 최씨(崔氏)의 낙랑국(樂浪國)이 된다. 서기전195년에 최숭(崔崇)이 발해만 유역에 있던 단군조선의 낙랑에서 한반도로 배를 타고 이동하여 대동강 평양 지역에 정착한 것이 되는데, 처음에는 북부여를 상국으로 모셨으나 북부여 후기에 북부여가 쇠퇴하자 한(漢)과 우호적 관계를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서기전108년에 발해만 유역의 낙랑은 소위 한사군(漢四郡)이 되어 서기313년에 고구려에 의하여 완전히 소멸되기까지 낙랑군이라는 이름으로 생멸을 반복하였는데, 한반도 평양의 낙랑은 서기37년에 고구려의 호동왕자로 인하여 고구려에게 망하였던 것이 된다. 즉 서기37년 이후에 기록되는 낙랑은 발해만 유역에 있던 낙랑이 되는 것이다.
<말갈의 침입>
서기전11년 말갈이 3천여명의 군사로 침입하여 위례성을 포위하였다. 백제는 성문을 굳게 닫고 싸우지 않았고, 10일이 지나 말갈군을 공격하여 500여명을 죽이거나 생포하였다. 가을에 백제는 마수성을 쌓고 병산에 목책을 세웠다.
<마한 공격>
서기전9년에 신록이 마한을 공격하였다.
<말갈 침입>
서기전8년에 말갈이 병산으로 침입하여 목책을 부수고 100여명의 군사를 죽인 뒤 약탈하고 돌아갔다.
<왕모가 돌아가시다>
서기전6년 봄에 위례성에 늙은 노파가 남자로 변하고 호랑이 다섯 마리가 성 안으로 들어왔다. 왕모(王母)께서 돌아가셨다.
여기서 왕모는 온조왕의 어머니 소서노가 아니다. 소서노는 서기전19년에 어하라국에서 훙하고 비류가 대를 이었던 것이다. 사실적인 표현이기는 하나 비유적인 표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만약 서기전19년에 소서노가 훙하지 않고 온조를 따라 왔다면 서기전6년에 왕모가 돌아가셨다는 기록은 사실이 될 것이다.
여기 서기전6년을 소서노가 훙한 서기전19년으로 보면, 서기전18년은 서기전31년이 되고 서기전31년은 소서노가 어하라국으로 책봉받은 해가 되는데, 소서노의 어하라국의 역사가 온조백제의 역사에 중첩되어 기록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늙은 노파가 남자로 변하고 호랑이 다섯 마리가 궁안으로 들어왔다라는 것은, 비류가 왕이 될 목적으로 서기전19년에 어머니 소서노로 변장하여 궁으로 자객과 함께 들어와 어머니 소서노(왕모)를 시해하고 왕이 된 것이 아닌가 한다.
<한성(漢城) 천도>
서기전6년 가을에 한산(漢山) 밑에 성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들을 옮겼다. 수도를 이전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서기전5년에 수도를 한성(漢城)으로 옮겼다. 한성은 한산(漢山:지금의 남한산성)의 아래에 있는 수도이다. 제2의 소도인 한성은 위례성이 아닌 몽촌토성이 된다. 서기371년에 한산(漢山)으로 천도하기까지 376년간의 수도가 된다. 이후 한산에서 100년을 지나고 서기475년에 공주(웅진)으로 천도하였고 이곳에서 63년을 지내고 서기538년에 부여(사비)로 천도하였다. 그래서 지금의 서울을 수도로한 소위 한성백제는 서기전18년부터 서기475년까지 약493년간이 된다.
<국모 제사>
서기전2년에 국모(國母)의 사당을 세우고 국모에게 제사를 지냈다. 여기서 국모가 왕모(王母)인 소서노라면 서기전19년에 돌아가신 어머니 소서노를 온조왕이 제사를 모신 것이 된다.
<이후 연대기>
서기전2년에 낙랑군이 위례성에 불을 질렀다.
서기전1년에 말갈이 침입하였다. 이때 백제는 말갈 추장 소모를 사로잡았다.
서기4년에 백제가 말갈로 쳐들어가 많은 말갈군을 죽이고 포로를 잡아왔다.
서기6년 웅천에 목책(木柵)을 설치하였다가 마한왕(學王)이 책망하니 허물었다.
서기7년에 왕궁의 우물이 넘치고, 한성의 민가에서 말이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소를 낳았다.
서기8년 겨울에 온조왕은 사냥을 간다고 소문을 낸 뒤, 마한을 습격하였다.
<마한 병합>
서기9년에 마한의 원산성과 금현성을 항복시키고 마한을 멸망시켰다. 여기 마한은 진(辰王)왕이던 기씨(箕氏) 마한왕(馬韓王)의 나라를 가리키고, 그 외 소국인 마한 54국은 근초고왕 때까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 된다.
<이후 연대기>
서기9년에 왕자 다루를 태자로 봉하였다.
서기13년에 민가를 남부와 북부의 2부로 나누었다.
서기15년에 민가를 다시 동과 서로 나누어 더 설치하였다.
서기22년에 말갈이 침입하였다.
서기23년에 우보 울음이 졸하였다.
서기25년에 남옥저가 귀순하였다. 남옥저의 백성들이 백제로 망명하여 투항한 것이 된다.
여기서 남옥저는 백두산의 남쪽으로 동해안에 걸친 나라가 될 것이다. 동옥저는 이 남옥저의 동북에 위치하여 백두산 동쪽으로 두만강 유역에 있는 것이 되고, 북옥저는 백두산의 북쪽에 위치하며 서옥저는 백두산의 서쪽으로 압록강 유역에 위치한 것이 된다. 동옥저의 동쪽으로 동해안에 걸친 나라가 원래 예(濊)가 되는데 한반도의 남쪽으로 이동한 일족이 후대에 동예(東濊)로 불리는 것이다. 서기전69년경 이후에 북부여 제실녀(帝室女)인 파소가 동옥저를 거쳐 진한의 나을촌으로 배를 타고 간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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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사무총장.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동안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1. 홍익인간(弘益人間) 천부(天符)의 역사는 마고성(麻姑城:파미르고원)의 마고(麻姑)시대인 서기전70378년 계해년(癸亥年)부터 시작되었음을 최초로 밝혔음.
2. 역법(曆法)이 시작된 해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585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3. 황궁씨를 이은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다는 것임을 밝혔음.
4.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무한조화순환역(無限造化循環易), 음양오행(陰陽五行), 태양태음성력(太陽太陰星曆), 단군조선의 정치행정 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배달나라 시대의 음양오행수리역(陰陽五行數理易)이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5.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히고,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으며,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에게 제(祭)를 올리는 권한을 가진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있었던 당요(唐堯)의 전란(戰亂)으로 인한 단군왕검(檀君王儉)의 동북 아사달로의 이동과정임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천자로 불리는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의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인 천자(天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우 치수기념 부루공덕 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여, 서기전2267년 이후 우(禹)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겨 남악(南嶽) 형산(衡山)에 세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추장(酋長)의 후손임을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최초 해독학자 허대동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 해독의 검증에 참여하여 첨수도(尖首刀),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상형 및 표음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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