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뿌리를 찾아서)/홍익인간 7만년 역사

[홍익인간 348] 고려(高麗) 연대기 10

양해천 2018. 1. 23. 13:19

[홍익인간 348] 고려(高麗) 연대기 10

2012년 06월 12일 (화) 08:02:24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24. 제24대 원종(元宗:서기1260년~서기1274년) 

고종의 태자가 몽고에서 돌아와 즉위하였다. 

서기1260년에 이인로가 파한집을 간행하였다. 

서기1260년에 김준이 유경을 밀어내고 제1인자가 되었다. 이에 원종은 왕권회복을 위하여 태자 심을 몽고에 보내어 개경환도가 김준 등의 무신들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고하였다. 이에 몽고는 사신을 보내어 송나라를 칠 테니 김준 부자가 구원병을 이끌고 몽고로 오게 하였다. 

이에 김준이 사신을 죽이려 하였으나 이를 눈치 챈 원종이 임연에게 김준을 죽이게 하였다. 그러나 김준을 죽인 임연도 개경환도를 반대하게 되었고, 원종을 상왕으로 삼아 폐위시키고 안경공 창을 즉위시켰다. 이에 몽고에 있던 태자가 몽고 세조(쿠빌라이)에게 고하니 몽고에서 사신을 보내어 원종과 창과 임연을 불러 올렸다. 원종은 임연의 아들 임유간을 두려워 하여 폐위사건의 진상을 털어놓지 못하였는데, 원종을 따라갔던 이장용이 이 사실을 알리자 몽고 세조가 임유간을 감옥에 가두었다. 이 소식을 들은 임연은 고민하다 병이 나서 죽고 맏아들 임유무가 권력을 물려받았다. 

원종은 고려로 돌아왔으나 강화로 가지 않고 개경에 머물렀다. 이에 임유무가 군사들을 이끌고 개경으로 향하였는데, 원종이 송송례와 홍문계에게 임유무를 제거하라 명하여, 이에 임유무가 살해되었다. 이로써 100년 가까이 지속된 무신정권이 막을 내렸다(정중부-경대승-이의민-최충헌-최우-최항-최의-유경-김준-임연-임유무). 

<개경 환도> 
서기1270년에 원종은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원종은 반몽파를 쫓아내고 친몽파를 중용하였다. 

<삼별초의 대몽항재> 
원종이 강화의 삼별초(좌별초, 우별초, 신의군)를 해산시키려 하였는데, 이에 배중손은 왕족인 스화후 온을 즉위시키고 대몽항전을 시작하였다. 원종은 김방경을 불러 어명을 내려 몽고군과 합쳐 삼별초를 토벌하게 하였다. 이에 배중손은 강화도를 버리고 남해의 진도를 근거지로 삼았다. 

김방경은 아해, 홍다구 등의 몽고 장수와 여몽연합군을 구성하여 진도를 공격하였으나 번번히 실패하였다. 

서기1271년에 김방경은 아해 대신 출전한 몽고 장수 흔도와 홍다구 등과 함께 대군을 이끌고 진도를 총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배중손은 전사하고 승화후 온은 살해되었다. 진도에서 제주도로 옮긴 김통정의 삼별초는 항전을 계속하였다. 

몽고는 수도를 연경으로 옮겼다. 

서기1273년에 1만명의 여몽연합군이 탐라(제주도)를 공격하여 김통정의 삼별초를 진압하였다. 

서기1274년에 몽고는 남편이 없는 여자들을 보내라 하여 고려에서는 결혼도감을 설치하여 혼자 사는 여자와 남편 없는 여자, 역적의 아내, 노비의 딸 등을 원나라에 보냈다. 

원나라는 고려의 묘호에 왕과 충을 붙이도록 하고 폐하를 전하로, 태자를 세자로 강등하도록 하였고, 관제도 바꾸었다. 또 고려의 세자를 원나라 공주와 혼인하도록 하였다. 원종의 태자 심이 원나라 세조(쿠빌라이)의 딸과 혼인하여 이후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었다. 

원종(元宗) 임금의 아들 경효왕(景孝王:충렬왕)께서 일찍이 연경(燕京)에 계실 때 연나라 여인의 유혹을 받았는데, 헤어질 때 연꽃 한 개를 손에 쥐어주며 꽃이 시들면 자신도 죽는 것으로 알라고 하였고, 이후 꽃을 보니 시들어 죽으려 하므로 임금이 다시 연나라로 가려 하니, 이존비(李尊庇)가 청하여 연나라로 가서 그 여인을 찾게 되었다. 그 여인이 울면서 시를 바쳤는데 이에 이존비가 임금이 이 시를 보면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커질까 염려되어, 그녀가 쓴 원래의 내용과는 완전히 다르게 정이 떨어지는 내용으로 다시 고쳐 써서 임금께 바쳤다. 이에 임금은 이존비가 몰래 고쳐 쓴 시를 보고 그 여인에 대하여 크게 노하고 마침내 귀국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도 임금이 연나라 여인을 원망하기를 끊이지 않으므로, 이존비가 당시 임금으로 하여금 속히 귀국하도록 하기 위하여 시를 고쳐 바쳤던 일을 실토해 버렸다. 이에 임금이 화가 나서 이존비의 관직을 뺏고 유배를 보내 버렸다. 이에 문의태자(文懿太子)와 조정의 신하들이 반복하여 유배를 풀 것을 아뢰니, 임금께서도 역시 후회하며 깨달아 관직을 회복시키고 불러 들였는데, 사자가 이존비에게 채 가기도 전에 숨졌다. 임금이 이를 듣자 크게 슬퍼하며 조회를 폐하였다. 이에 명하여 장사를 왕례(王禮)로써 치르게 하고, 마침내 형강(荊江)의 위에 있는 산 4리를 봉하였는데, 지금은 왕묘동(王墓洞) 산사리(山四里)라 한다. 

서기1274년에 원종이 붕하고 세자 심이 원나라에서 돌아와 즉위하였다. 


25. 제25대 경효왕(景孝王:충렬왕(忠烈王):서기1275년~서기1309년) 

원종의 세자 심이 원나라에서 돌아와 즉위하였다. 

<여원 제1차 일본 정벌> 
서기1274년에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는 일본을 정벌하려, 고려에게 병선 900척을 만들게 하고, 도원수 흔도와 부원수 홍다구에게 2만5천의 군사를 주어 고려로 보냈다. 이에 김방경을 총대장으로 삼아 8천여명의 군사를 동원하고 수군 6천7백명을 붙여 총 4만여 명의 여원연합군이 일본 정벌길에 올랐다. 일본의 대마도와 이키 섬을 점령하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 한밤중에 태풍이 불어 배가 부서지고 수많은 군사들이 물에 빠져 죽었다. 

서기1275년에 몽고는 응방을 설치하고 매를 잡아 바치게 하였다. 

후암(厚庵) 이존비(李尊庇:서기?~서기1287년) 선생이 한때 서연(書筵:왕세자 학습관)에 있으면서 자주부강책(自主富强策)을 논하였는데, 상주하여 가로되, “우리나라는 한(桓), 단(檀:배달), 조선(朝鮮), 북부여(北夫餘), 고구려(高句麗) 이래로 모두 부강자주(富强自主)하였고, 또 건원칭제(建元稱帝)의 일은 우리 태조(太祖:왕건 神聖太王, 연호 天授) 초까지 역시 일찍이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대(事大)의 논의로 정하여 국시(國是)로 삼고, 군신상하(君臣上下)가 굴욕을 감수하며, 스스로 새롭게 하려 도모하지 않음은 하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나라를 보전함은 진실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어찌 천하 후세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까? 또 왜와 원한을 사 만일에 원실(元室)에 변이 있으면 장차 어디에 기댈 것입니까? 나라를 위하여 칭제(稱帝)하는 일은 시기를 구실로 기피하면 진실로 끝내 회복하기 어려우니, 자강책(自强策)은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상주하는 바가 비록 잠잔다 하더라도 듣는 자가 이를 그르다고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후에 또 왜를 대비하여 다섯가지 일(五事)을 말하였는데, 첫째, 호구(戶口)를 상세히 파악하여 백성을 병사로 삼고, 둘째, 군대와 농사는 하나로 만들어 바다와 육지에서 함께 지키며, 셋째, 군량을 축적하여 놓고 전함(戰艦)을 수리하고 만들고, 넷째, 수군(水軍)을 확장하여 육지전(陸地戰)도 익히게 하며, 다섯째, 지리(地理)를 상세히 익여 인화(人和)를 확보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서기1280년에 원나라 세조는 일본정벌을 위하여 정동행성을 고려에 설치하였다. 

<여원 제2차 일본 정벌> 
서기1281년에 원나라는 15만의 군사를 내어 일본 2차정벌에 나섰고 고려는 김방경이 1만 군사로 합세하였다. 또다시 태풍으로 여원연합군 16만 중에서 1만9천명만 살아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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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사무총장.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동안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1. 홍익인간(弘益人間) 천부(天符)의 역사는 마고성(麻姑城:파미르고원)의 마고(麻姑)시대인 서기전70378년 계해년(癸亥年)부터 시작되었음을 최초로 밝혔음. 

2. 역법(曆法)이 시작된 해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585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3. 황궁씨를 이은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다는 것임을 밝혔음. 

4.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무한조화순환역(無限造化循環易), 음양오행(陰陽五行), 태양태음성력(太陽太陰星曆), 단군조선의 정치행정 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배달나라 시대의 음양오행수리역(陰陽五行數理易)이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5.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히고,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으며,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에게 제(祭)를 올리는 권한을 가진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있었던 당요(唐堯)의 전란(戰亂)으로 인하여 단군왕검(檀君王儉)께서 동북의 아사달로 이동한 과정임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천자로 불리는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한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인 천자(天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우 치수기념 부루공덕 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였으며, 우비는 서기전2267년 이후 우(禹)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겨 남악(南嶽) 형산(衡山)에 세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추장(酋長)의 후손임을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등에 새겨진 문자를 단군조선 문자로서 최초로 해독한 학자 허대동 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의 연구에 검증차 참여하여 첨수도(尖首刀),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그 위헤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상형 및 표음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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