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第三章
謹案諸史 會通詳考則當時之堤上公
근안제사 회통상고칙당시지제상공
世稱之爲硏理之家 其於申自天公之言尤明也
세칭지위연리지가 기어신자천공지언우명야
赫居世王曾孫 始有兄弟 時人曰 第一不及於第二之神聖云
혁거세왕증손 시유형제 시인왈 제일불급어제이지신성운
則其第二者卽婆娑王而公之五代祖也
칙기제이자즉파사왕이공지오대조야
其所謂神聖者 非但氣品之謂而亦指其理道之如何矣
기소위신성자 비단기품지위이역지기리도지여하의
公之祖阿道公 享年百二十四歲
공지조아도공 향년백이십사세
考勿品公 享年百十七歲
고물품공 향년백십칠세
後代亦多百歲之人則公家傳統 必若有特理
후대역다백세지인칙공가전통 필약유특리
此或非昔世天雄道之傳守者也
차혹비석세천웅도지전수자야
公之澄心軒詩曰
공지징심헌시왈
煙景超超望欲流
연경초초망욕류
客心搖落却如秋
객심요락각여추
世間堅白悠悠事
세간견백유유사
坐對澄江莫說愁
좌대징강막설수
云
운
於斯 確然知公之抱道之一端也
어사 확연지공지포도지일단야
[해설]
제3장
삼가 모든 역사를 자세히 살피어 이리저리 상세히 참고하건대,
당시의 세상 사람들은 제상공(堤上公)을
천리(天理) 연구가(硏究家)라 하였으니,
그것은 신자천(申自天) 공의 말로도 더욱 분명하다.
혁거세왕의 증손에 형제가 있었다.
그때의 사람들은 큰아들이 작은아들의 신성(神聖)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 작은아들이 바로 파사왕(婆娑王)1)이요 공의 5대조다.
소위 신성(神聖)이라는 것은 비단 기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요,
역시 그 이치(理致)와 도리(道理)가 어떠한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공(公)의 할아버지 아도공(阿道公)2)은 124세까지 살았으며,
아버지 물품공(勿品公)3)은 117세까지 살았고,
후대에도 역시 백 세까지 산 사람이 많이 있었으니,
공(公)의 집안 전통이 반드시 특별한 이치가 있는 것 같다.
이는 혹 옛날 천웅도(天雄道)의 전수자(傳授者)이기 때문이 아닌가.
공(公)의 징심헌시(澄心軒詩)4)에 이르기를,
아지랑이 초초하게 흐르는 걸 바라보니
나그네의 마음도 가을처럼 지는구나
세간의 견백(堅白)5)도 유유한 일도
징강(澄江)6)을 대하고 앉아 근심을 잊는다
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공(公)이 품은 도(道)의 일단(一端)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세부해설]
* 박제상 생전의 영해박씨 문중은 수증복본의 수련법을 대대로 전수하여
장수한 것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본다.
1) 파사왕(婆娑王) : 신라제 5대왕 재위 80~112년, 유리왕의 둘째아들
2) 아도공 : 휘(諱)는 대선(大善). 추대하여 갈문왕이 되었다. (영해 박씨 세감)
3) 물품공 : 휘(諱)는 천보(天寶). 호는 물품(勿品)이다. (영해 박씨 세감)
4) 징심헌시(澄心軒詩) : 이 시는 신라 눌지왕 2년에 박제상이 왜국에 들어갈 때 지은 것이라고 했다. (영해 박씨 세감)
5) 견백(堅白) : 중국 춘추전국시대 공손룡(公孫龍)이라는 사람이 내건 일종의 궤변.
단단하고 흰 돌은 눈으로 보면 흰 것을 알수 있으나 단단한 것은 모르며,
손으로 만지면 단단한 것만 알수 있을 뿐 흰줄은 모르므로,
단단한 것과 흰 것은 다르다는 이론.
곧 억지를 써서 옳은 것을 그르다 하고 그른 것을 옮다 하며, 같은 것을 다르다고 하는 궤변.
견백석(堅白石)과 같은 말이다.
6) 징강(澄江) : 징심헌(澄心軒) 앞에 앞에 흐르는 강.
박제상 생전 당시의 신라영토는 무궁화 자생산지(근화향)와 관련이 있고
그 지역은 양자강의 중심 도시 무한 인근이다.
징강이 어디인지는 연구대상이다.
징강이 한강(漢江)이나 장강(長江)으로 바뀌면 모든게 해결된다.
그 유명한 황학루가 있지 않은가? 여담이다.
단지 한단고기는 북방으로 부도지는 남방으로 전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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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신라의 혼이 살아 숨쉬는 호북성 무한(武漢) 황학루(黃鶴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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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학루는
호남 악양의 악양루(岳陽樓)와
강서 남창의 등왕각(騰王閣)과 함께
강남의 3대 명루(名樓), 천하절경(天下絶景)이라 일컬어 지는 곳이다.
1,700여년을 내려 오면서 이곳은 7번 소실되고 7번 중건되었는데,
지금의 모양은 제일 마지막에 중건된 1985년의 것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 내릴 수 있는 최신식의 누각이다.
황학루는 삼국 오나라 황무 2년에 무창 사산(蛇山)에 처음 세워졌으며,
꼭대기에 동탑이 앉은 약 28m의 3층 건축물이었다.
여러 전란을 지나 청대의 양식으로 새로 건설한 황학루는
더욱 웅장한 모양의 것으로 총 높이가 51.4m인 5층 높이가 되었다.
이곳은 누각을 중심으로
정자와, 회랑, 비방(牌坊), 시비(詩碑), 고전상무서비스가(古典商務服務街)로 구성되어 있다.
새로 지어진 지층은 예전 것에 비해 넓이가 배로 늘어난 30m로,
아래에 펼쳐진 무한의 시내전경을 여유롭게 즐기기에 좋다.
황학루는 사산위에 있으면서 장강을 바라보고 있어서 주변의 경관이 아름답고 운치있다.
그 때문인지 이백(李白), 백거이(白居易), 육요(陸游), 양신(楊愼), 장거정(張居正) 등의
많은 문인과 시인이 이곳을 시로 읊었는데, 기록에 남아있는 것만 300수 이상이다.
* 황학루의 유래
삼국시대 오나라 손권시대에 이 곳에서 신씨(辛氏)라고 하는 사람이 주막을 하고 있었다.
어느날 노인이 찾아와서 술을 달라고 하여 한잔을 드렸더니
더 큰잔으로 달라고 하여 여러잔을 마시고는 돈도 내지 않고 떠났다.
며칠후에 또 다시 찾아와서 술을 달라고 하니
신씨는 싫은 기색이 없이 계속 술을 주기를 6개월이나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동안 밀린 술값을 값겠다고 하며 노란 귤껍질로 벽에다가 학을 그리니 황학도가 되었다.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부르면 학이 튀어 나올터이니 이것이 그동안의 술값이다"라고 떠났다.
그러자 신씨는 손뼉을 치고 노래를 하니 정말로 노란학이 튀어나와 춤을 덩실덩실 추는 것이었다.
이 소문을 듣고 많은 손님들이 찾아와서 신씨는 돈을 많이 벌 게 되었다.
10년후 노인이 다시 나타나자 술을 대접하려고 하니,
술은 필요 없고 학을 데려가겠다고 하면서 피리를 부니
노란학이 나타나 구름위로 휠훨 날아가고 나서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을 보고
신씨는 주막을 헐고 그 자리에 정자를 지어
노인과 학을 기리기 위해 황학루(黃鶴樓)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 노인은 비문위(費文褘)라는 선인 이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 황학루는 오나라 시절에는 파수대 역할을 하기도 하면서
오늘날까지 수 많은 문인들이 찾아와 시를 남기고 갔는데
당나라 시인 최호의 황학루가 제일 유명하다.
* 황학루(黃鶴樓)
- 최호(崔顥)
昔人已乘黃鶴去(석인기승황학거) 옛날에 신선은 이미 황학을 타고 날아가 버리고,
此地空餘黃鶴樓(차지공여황학루) 지금 이 땅에는 그저 황학루만이 남아 있다.
黃鶴一去不復返(황학일거불복반) 황학은 신선을 태우고 간 뒤 돌아올 줄 모르고,
白雲千載空悠悠(백운천재공수수) 흰 구름만 천년동안 변함없이 하늘에 떠있다.
晴川歷歷漢陽樹(청천역역한양수) 맑은 양자강 건너편에 한양거리 나무들 보이고,
芳草妻妻鸚鵡洲(방초처처앵무주) 강 가운데 앵무주에는 향긋한 풀이 무성하다.
日暮鄕關何處是(일모향관하처시) 해 지고 고향은 대체 어디에 있을까 둘러보니
煙波江上使人愁(연파강상사인수) 강 위에 저녁 안개 서리고 시름만 더해진다.
그후 시선(詩仙)이라 불리우는 이백(李白)이 황학루에 왔다가 이 시를 보고
더 이상 좋은시를 지을 수가 없어서 황학루에 관한 시 짓는 것을 포기하였다고 한다.
훗날 황학루에서 맹호연을 보내며 라는 칠언절구의 시로서 대신했다고 한다.
* 黃鶴樓送孟浩然之廣陵(황학루송맹호연지광릉) 황학루에서 맹호연이 광릉으로 가는 것을 보내며
- 이백(李白)
故人西辭黃鶴樓(고인서사황학루) 옛 친구는 이 황학루에서 이별 고하고,
烟花三月下揚州(연화삼월하양주) 꽃피는 삼월에 배타고 양주로 내려갔다
孤帆遠影碧空盡(고범원영벽공진) 외로운 돛단배 먼 그림자 푸른 하늘로 사라지고,
唯見長空天際流(유견장공천제류) 뵈는 것 아득히 하늘에 닿은 장강물 뿐이어라
황학루 1층에는 전설의 노인이 노란 학등에 앉아 피리를 불려 구름위로 날아가고
황학루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춤을 추며 환영을 하는 벽화가 모자이크 벽돌로 그려져 있다.
황학루 경내에는 수많은 시와 시비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학교에서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왕희지, 조맹부등의 명필이 돌에 새겨져 있고,
이백을 비롯한 유명한 시인들이 시가 돌에 조각이 되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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