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 210] 단군조선과 고대중국의 관계역사 6
-단군조선(檀君朝鮮)과 우순(虞舜) 2-
9. 당요(唐堯)의 9주에 병주, 유주, 영주의 3주를 더 설치하다
스스로 천자가 된 순(舜)은 나름대로 나라를 키울 욕심으로 서기전2357년경에 요임금이 설치하였던 9주(州)에다, 기주(冀州)를 나누어 병주(幷州)와 유주(幽州)를 설치하고, 연주(兗州)를 나누어 영주(營州)를 설치함으로써, 3주(州)를 추가하여 모두 12주(州)로 만들었다.
이러한 순(舜)의 행위는 정식 천자(天子)로서 상국(上國)인 단군조선으로부터 인정(認定)받거나 윤허(允許)를 받은 것이 아니어서 원칙적으로 대역죄(大逆罪)에 해당한다 할 것인데, 아버지 유호씨는 이를 단군왕검 천제(天帝)께 보고하였던 것이 되며, 단군왕검 천제께서는 순의 소행을 좀더 지켜보신 것이 된다.
10. 치수담당 곤을 처형하고 우에게 맡기다
서기전2280년에 우순(虞舜)은, 서기전2288년부터 9년간 치수를 담당하였던 곤(鯤)이 치수에 성공하지 못하므로, 그 책임을 물어 우산(羽山)에서 곤을 처형하였다.
이에, 소위 제순(帝舜:虞舜)은 곤의 아들 우(禹)에게 사공(司空)의 벼슬을 주어 치수를 맡겼다. 이리하여 사공 우는 태자부루에게서 치수법을 전수받은 해인 서기전2267년까지 13년간을 치수에 힘을 쏟았다.
11. 단군조선의 도산회의(塗山會議) 개최
서기전2280년부터 서기전2267년까지 대홍수의 치수를 담당하였던 사공(司空) 우(禹)는 13년간을 홍수에 직접 뛰어들어 몸소 체험하면서 치수에 힘썼다. 심지어 집을 지나쳐도 들어가지 않았고, 둑을 쌓기도 하고 허물기도 하였으며, 진흙밭을 썰매를 타고 다니기도 하고 산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 보기도 하며 치수를 독려하고, 치수방법을 연구하기도 하고 여러모로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물은 빠지지 않았고 백성들은 진흙탕에 빠져 전염병에 노출되어 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禹)는 아버지 곤(鯤))과 다른 점이 있었다. 우는 혼자서는 더 이상 방법이 없자 다른 방책을 찾았다. 그 단서를 회계산(會稽山:茅山)에 올라 찾았다. 그곳에서 우는 자허선인(紫虛仙人)을 찾아 뵙고 방법을 여쭈었다. 이에 자허선인은 황부중경(黃部中經)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사공 우(禹)는 자신의 임금인 순(舜)에게 천조(天朝:상국, 천국의 조정)에 구원을 요청하도록 간(諫)하였다. 이에 제순(帝舜)은 우(禹)의 간청을 받아들여 단군왕검 천제(天帝)께 치수에 관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단군왕검 천제께서는 순의 상소를 거두어들이고, 서기전2267년에 당시 진한(眞韓)으로서 섭정을 하고 있던 태자(太子)부루(扶婁)에게 명하여 중원으로 가서 천하 백성들을 구하라 하셨던 것이며, 이에 태자부루는 치수에 관한 권한징표(權限徵標)인 천부왕인(天符王印)과 치수를 위한 도구(道具)인 신침(神針)과 치수법(治水法)을 담은 황구종(皇矩宗)이라는 금간옥첩(金簡玉牒)의 3가지 보물을 가지고, 도산회의(塗山會議)를 주관하러 행차하였던 것이다.
이때 사공 우는 순임금에게 간청을 한 이후 태자부루께서 왕림(往臨)하시기 전 100일 동안 목욕재계(沐浴齋戒)하며 삼신상제(三神上帝)의 천사(天使)이신 태자부루를 영접(迎接)할 준비를 하였다.
산동반도 남쪽에 위치한 회수(淮水)의 하류지역에 있는 도산(塗山)에 도착한 태자부루는 대동한 번한(番韓) 낭야(琅耶)로 하여금 회의를 진행하도록 하여, 사공 우에게 치수에 관한 모든 전권(專權)을 부여하고 치수에 필요한 도구와 치수법을 전수(傳授)하였다.
12. 역법(曆法)을 협용(協用)하다
서기전2267년 태자부루는 도산(塗山)으로 가던 중 번한의 수도였던 험독(險瀆)에 들러 반달간 민정(民情)을 청문하였으며, 남쪽으로 가던 중 번한(番韓) 낭야(琅耶)로 하여금 태산(泰山:岱宗)에 올라 천제(天祭)를 지내게 하였고, 또 서기전2311년에 개축하여 두었던 산동반도 남쪽에 위치한 가한성(可汗城)인 낭야성(琅耶城)에서 천자(天子) 순(舜)의 알현을 받고 시(時)와 월(月)을 협의하여 맞추었다. 즉 시간과 달력을 협의하여 맞추었던 것이다. 이후 역법(曆法)은 음력(陰曆) 전용이 아니라 배달조선의 태양태음력(太陽太陰曆)을 다시금 사용한 것이 된다. 이때 선기옥형(璇璣玉衡)의 제작법과 원리를 전수한 것으로 된다.
13. 구려분정(九黎分政)의 감독
도산회의에서 태자부루는 천자 순(舜)의 신하 사공(司空) 우(禹)에게 치수법을 전수하고 번한 낭야를 통하여 천부왕인(天符王印)과 신침(神針)과 황구종(皇矩宗)을 전수하면서, 천자 순의 책무(責務)에 대하여 명하였다.
즉, 순(舜)이 임의로 설치한 3주 중에서 병주(幷州)는 그대로 두고 유주(幽州)와 영주(營州)를 폐지하여 천조(天朝:단군조선 조정)의 직할영역에 편입시키고, 회대(淮岱) 지역의 구려분정(九黎分政)의 감독을 맡도록 하며, 5년마다 천사 태자부루께서 순행할 때 가한성(可汗城)에 설치한 관청인 감우(監虞)에서 우공(虞貢)의 사례(事例)를 보고토록 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천자(天子) 자리를 찬탈하였던 순(舜)은 천조(天朝)에 구원을 요청함으로써 회대지역의 단군조선 직할 제후국을 감독하는 책임자가 되는 등 정식 천자(天子)로서 윤허를 받았던 것이 된다. 이로써 순은 다시 아버지 유호씨에게는 효자가 되었으며, 상국인 단군조선에는 충신이 되었던 것이다.
14. 우공(虞貢)
서기저2267년 태자부루로부터 치산치수(治山治水)와 관련한 전권(專權)을 부여받은 사공 우는 마침내 치수에 성공하게 되었는데, 이에 천자(天子) 우순(虞舜)이 5년마다 가한성(낭야성)에 순시하던 태자부루께 치수와 관련한 국정을 보고하였는 바, 이를 우공(虞貢), 즉 우순(虞舜)이 바치는 조공(朝貢)이라 하는 것이다.
한편, 우공(禹貢)을 고대중국에서는 우(禹)가 제후들로부터 조공(朝貢)을 받은 것이라 기록하는데,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서기전2224년 이후의 하(夏)나라 시대 에 있었던 것을 가리키는 것이며, 천자 순의 조공과는 거리가 먼 것이 된다.
우공(禹貢)이 우(禹)가 바치는 조공이라면, 이는 우(禹)가 자신의 직속 임금인 순(舜)에게 바치는 것이 되고, 순이 상국(上國)인 단군조선(檀君朝鮮)에게 바치는 조공은 우공(虞貢)이 되는 것이다.
15. 치산치수(治山治水)와 산해경(山海經)
사공(司空) 우(禹)는 천사(天使) 태자부루로부터 치산치수에 관한 전권(專權)을 부여 받은 것을 증명하는 증표인 천부왕인(天符王印)을 지니고서 인력(人力)과 물자(物資)를 조달하였으며, 길이와 깊이를 재는 자(尺)인 신침(神針)으로 물길을 잡고, 치수법에 따라 물과 땅을 구분짓게 만들어 치수에 성공하였던 것이다.
이에 사공 우는 직속 신하 백익(伯益)과 함께 서기전2267년경부터 서기전2247년경 사이에 온 산천(山川)을 돌아다니며 인문지리(人文地理)를 살펴서 책을 엮으니 이를 산해경(山海經)이라 한다. 이리하여 산해경은 치산치수와 관련하여 지어진 우공(虞貢)의 사례(事例) 중 하나에 해당하는 것이 된다.
16. 사공(司空) 우(禹)의 치수기념부루공덕비(治水記念扶婁功德碑)
치수에 성공한 사공 우는 서기전2267년경부터 서기전2247년경 사이에 대홍수의 중심이던 양자강(長江) 남쪽에 자리한 남악(南嶽) 형산(衡山)의 정상인 구루봉에 치수기념비를 세웠다.
이 형산 구로봉에 세워진 우의 치수기념비는 그 글씨체가 과두문(蝌蚪文)으로 새겨졌는데, 비문의 내용은, 우가 치수에 힘썼으나 실패를 거듭하였으며, 그러다가 신(神)의 은덕으로 치수에 성공하여 백성을 구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 신(神)은 삼신상제(三神上帝)를 가리키는데, 삼신(三神)은 천지인(天地人) 삼신으로서 그 대표격은 천신(天神)이며, 상제(上帝)는 상국(上國)의 임금(帝)이자 천국(天國)의 임금인 천제(天帝)인 바, 삼신상제는 곧 천신(天神)의 화신(化身)인 단군왕검(檀君王儉) 천제(天帝)를 가리키는 것이 되고, 우(禹)에게 가르침을 전달한 진한(眞韓) 태자부루는 천제(天帝)의 사자(使者)인 천사(天使)인 것이다.
천사(天使)는 곧 천제(天帝)의 대리자인 바, 우의 치수기념비에 새겨진 신(神)은 곧 태자부루도 지칭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로써 소위 우의 치수기념비는 단순한 치수기념비가 아니라 삼신상제(三神上帝)이신 단군조선의 단군왕검(檀君王儉) 천제(天帝)와 그 사자(使者)인 태자부루(太子扶婁)의 공덕(功德)을 새긴 비(碑)가 되는 것이다.
17. 순의 반역과 형제전쟁(兄弟戰爭) - 우순(虞舜)과 유상(有象)
서기전2246년경부터 천자(天子) 순(舜)은 다시 불효자, 불충신이 되었다. 즉 순임금은 단군조선을 반역하기 시작하였다. 즉, 천자로서의 직분을 망각하고 상국(上國)인 단군조선의 산동지역 영토를 침범하여 유주(幽州)와 영주(營州)를 다시 설치하였는데, 연로하신 단군왕검 천제(天帝) 때문에 태자부루께서 순행하지 않자 이 틈을 타서 잠재적인 반역자였던 천자 순이 대역죄(大逆罪)를 범한 것이다. 서기전2246년에 단군왕검 천제께서는 125세이셨다.
이에, 서기전2240년에 제2대 천왕(天王)에 즉위하신 부루(扶婁) 단군은 순(舜)이 설치한 유주(幽州)와 영주(營州)를 정벌하고서 그 땅에 제후를 봉하였으며, 대역죄인 순(舜)을 제거하도록 조치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단군조선의 사자(使者) 유호씨(有戶氏)는 작은 아들 유상(有象)과 치수에 공이 큰 우(禹)에게 명하여 협공(協攻)으로 순(舜)을 쳐서 멸하라 명하였던 것인데, 이것이 고대중국의 역사기록상 우순(虞舜)과 유상(有象)의 소위 형제전쟁(兄弟戰爭)이며, 이에 서기전2224년 순은 우(禹)의 군사에게 쫓기어 남쪽으로 피하다 창오(蒼梧)의 들에서 죽임을 당하였던 것이다.
역사가들은 순임금이 요임금의 뒤를 이어 태평시대를 이었다라고 기록한다. 그러나 진작 단군조선의 태평시대인 것이다. 단군조선은 절대로 먼저 다른 나라를 침범을 하지 않았으며 어떻게든 잘못을 깨우치려 가르침을 먼저 폈다. 이것이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의 이념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堯)의 반란으로 시작된 고대중국의 역사를 이은 순(舜), 하(夏), 은(殷), 주(周)나라는 갈수록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법이 횡행(橫行)하여 단군조선의 가르침 즉 진리(眞理)의 도(道)를 들을 수 없어 스스로 망하기를 되풀이 하였던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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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사무총장. 트위트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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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의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 예읍의 추장의 후손임을 역사적으로 밝혔음.
*우비(禹碑, 우 치수기념 부루공덕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여, 서기전2267년 이후 우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긴 것임을 밝혔음.
*명도전(明刀錢) 최초 해독학자 허대동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 해독의 검증에 참여하여 첨수도,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거기에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문자임을 밝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