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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 212] 단군조선과 고대중국의 관계역사 8

양해천 2018. 1. 22. 09:43

[홍익인간 212] 단군조선과 고대중국의 관계역사 8

2012년 01월 30일 (월) 12:50:07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단군조선(번한,마한)과 하은주(夏殷周)의 관계역사 2- 

[단군조선과 하(夏)나라 시대] 

9) 우(禹)가 100일 기도를 올리다 

서기전2267년에 사공(司空) 우(禹)는 천조(天朝:단군조선 조정)에서 천제(天帝)의 명으로 태자부루께서 사자(使者)로 오신다는 소식을 들은 후 100일간 목욕재계하며 기도를 올렸다. 

백마제(白馬祭)를 올리기도 하며 온 정성을 다하여 삼신상제(三神上帝)와 천사(天使)께 제(祭)를 올렸다. 이리하여 천사(天使) 태자부루께서 현몽을 하시어 “나는 현이(玄夷)의 창수사자(蒼水使者)니라”하시며 사공 우에게 믿음을 주셨다. 여기서 현이는 북쪽의 나라인 단군조선 진한(眞韓)을 가리키며, 창수(蒼水)는 검푸른 물을 뜻하여 북극수(北極水)를 가리킨다. 즉 태자부루가 곧 천제자(天帝자)로서 삼신상제(三神上帝)이신 천제(天帝)의 사자(使者)임을 나타낸다. 

10) 태자부루께서 도산회의(塗山會議)를 주관하시다 

회수(淮水)의 하류쪽에 위치한 도산(塗山)의 회의장에 도착하신 태자부루께서 회의를 주관(主管)하셨다. 이에 번한 낭야(琅耶)를 사회(司會)로 삼아, 사공 우(禹)에게 치수에 관한 가르침을 주고 치산치수에 관한 권한(權限)을 부여하였으며, 이에 더하여 천자 순(舜)이 이행하여야 할 사항들을 명(命)하고 조치(措置)하였다. 

치수와 관련하여, 삼육대례(三六大禮)를 행한 사공(司空) 우(禹)에게 태자부루께서 치산치수(治山治水)에 관한 전권(專權)을 상징하는 천부왕인(天符王印)과 물의 깊이를 재는 도구인 신침(神針)과 구체적인 치수법을 적은 홍범구주(洪範九疇) 등을 전수(傳授)하셨다. 

또, 천자 순이 임의로 설치한 병주(幷州), 유주(幽州), 영주(營州) 중에서 병주는 그대로 두고, 유주와 영주를 폐지하여 단군조선의 직할 영역에 편입시켰다. 이때 유주 땅에는 지금의 북경(北京)과 천진(天津)을 중심으로 하는 고죽국(孤竹國)을 봉한 것이 되고, 영주는 산동지역에 있던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인 청구(靑邱) 또는 남국(藍國)에 붙인 것이 된다. 

또한, 태자부루께서 5년마다 순시할 때, 천자 순(舜)은 낭야성에 설치된 감우(監虞)에 들러 치수(治水) 등 우공(虞貢)의 사례(事例)를 보고토록 조치하였다. 

그리고, 천자 순으로 하여금 산동지역과 양자강 지역에 걸쳐 있는 단군조선의 제후국들인 구려(九黎)의 분정(分政)들을 감독하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즉 천자 순(舜)을 최상의 천하왕(天下王)인 태상천자격(太上天子格)으로 인정한 것이었다. 여기서 천군국(天君國)인 청구(靑邱)와 남국(藍國)은 제외된다 할 것이다. 

11) 사공 우가 치수(治水)에 성공하고, 낙서(洛書)를 얻고 산해경(山海經)을 짓다 

서기전2267년 태자부루로부터 치수법을 전수받은 사공 우는 체계적인 치산치수를 하여 22년 이상 끌어온 대홍수의 치수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천부왕인(天符王印)으로써 인력(人力)과 물자(物資)를 조달(調達)하였으며, 신침(神針)으로 물길을 잡고 둑을 만들고, 치수법(治水法)을 이용하여 물을 빼고 육지가 드러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백성들은 활기를 되찾아 일상 생활로 되돌아 가게 되었던 것이다. 

사공 우는 치수공사를 하던 중 낙수(洛水)에서 음양오행수리(陰陽五行數理)의 그림를 얻었다. 이를 낙서(洛書)라고 부른다. 이 낙서는 곧 배달나라 시대부터 있어온 음양오행수리(陰陽五行數理)를 나타낸 도표(圖表)인 것이다. 즉, 홀수는 양(陽)이고 짝수는 음(陰)이며, 사방(四方)과 중앙, 팔방(八方)과 중앙에 따라 음양(陰陽)의 수(數)를 배치한 역(易)인 것이다. 

즉, 1, 3, 9, 7은 양수(陽數)로서 태양(太陽)이 지구의 둘레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즉 북동남서의 방향으로 도는 모습으로 배치되어 있고, 2, 4, 8, 6은 음수(陰數)로서 지구가 자전(自轉)하는 방향 즉 시계침이 도는 방향의 반대방향으로 배치되어 있는 것이다. 중앙은 5의 자리가 된다. 그리하여 수리상으로 대각선은 물론 가로와 세로로 3개의 숫자 합이 모두 각각 15가 되며, 15라는 숫자는 1과 5을 합하면 6이 되어 천지인(天地人) 창조(創造)의 의미를 지니는 숫자가 되는 것이다. 

서기전3500년경에 태호복희(太皞伏羲)가 황하에서 얻었다는 하도(河圖)는 그 이전의 한국(桓國)시대부터 배달나라 시대에 내려온 음양오행수리역(陰陽五行數理易)으로서, 동서남북중의 오방(五方)에 1에서 10까지 음양의 수를 방향에 따라 배치한 역(易)인 것이다. 즉, 북남동서중의 순으로 1, 2, 3, 4, 5를 배치하고 다시 6, 7, 8, 9, 10을 순서대로 배치하고 있다. 이러한 배치는 우(禹)의 낙서(洛書)에서, 7과 9의 위치가 바뀌어 있으며, 2, 4, 8, 6의 음수가 45도 우회전한 상태에서 2와 4의 자리가 바뀐 형태가 되며 1, 3, 9, 7의 양수(陽數) 사이에 배치되어 있는 것이 된다. 

또, 사공 우는 치수를 마친 후, 신하 백익(伯益)과 함께 온 산천을 돌아다니며 인문지리를 조사하여 책을 엮어 산해경(山海經)이라 하였으며, 순임금에게 보고하고 바치어, 순임금으로 하여금 5년마다 순시하는 천조(天朝)의 사자(使者)이신 태자부루(太子扶婁)께 치수(治水)와 함께 우공(虞貢)의 사례(事例)로 보고토록 하였다. 

중국기록에서는 마치 산해경(山海經)을 우(禹)가 하(夏)나라 왕(王)이던 시절에 만든 것이라 기록하고 있기도 하나, 이는 역사적 사실에 어긋나는 것이다. 즉 우가 지은 산해경은 서기전2267년에서 서기전2247년경 사이에 치수와 관련하여 지은 것이 되며, 우가 하나라 시조가 된 서기전2224년보다 최소한 약 25년 이전에 지어진 것이다. 

하나라가 시작된 서기전2224년부터 서기전2195년경까지 약 30년간 단군조선의 사자 유호씨(有戶氏)와 하(夏)나라 사이에 전쟁(戰爭)이 있었으므로, 이 기간에 우(禹)가 산천을 답사하며 산해경(山海經)을 지었다라고 하는 것은, 왕으로 있었다는 사실에서 논리에도 전혀 맞지 않은 것이 된다. 

산해경(山海經)에는 당시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직할 영역이 되는 지역의 지리(地理)도 함께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단군조선의 명령 없이는 기록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으로서, 서기전2267년 도산회의(塗山會議)에서 태자부루께서 우순(虞舜)의 신하 사공 우(禹)에게 직접 명하여, 우(禹)가 치산치수에 관한 전권(專權)을 상징하는 천부왕인(天符王印)을 증표(證票)로 하여 이행한 것이 되고, 우공(虞貢)의 사례(事例)의 하나로 우가 순에게 보고하면, 이를 다시 천자(天子) 순(舜)이 천제자(天帝子) 태자부루께 보고한 것이 된다. 

12) 우가 형산 구루봉에 치수기념부루공덕비(治水記念扶婁功德碑)를 세우다 

사공(司空) 우(禹)는 서기전2267년 이후, 9주(州)의 27산(山)과 9수(水)를 다스려 몇 년에 걸쳐 치수를 마무리하고서, 서기전2247년 사이에 홍수의 중심지이던 양자강 남쪽에 위치한 남악(南嶽) 형산(衡山) 구루봉의 정상에 치수기념비를 세웠다. 비문의 글씨체는 과두문이었다. 후대 명(明)나라 때 학자인 양신(楊愼)이 해독한 글이 있다. 
承帝日咨 翼輔佐卿 洲諸與登 鳥獸之門 參身洪流 而明發爾興 久旅忘家 宿嶽麓庭 智營形折 心罔弗辰 往求平定 華岳泰衡 宗疏事衰 勞余神禋 鬱塞昏徙 南瀆愆亨 衣制食備 萬國其寧 竄舞永奔<77자> 
순 임금(帝舜)께서 좌우의 대신들에게 말씀하신 바대로, 여러 섬을 돌아다니며 산에 올라 새와 짐승들의 문을 드나들면서, 몸소 홍수에 뛰어들어 밝게 일으키려, 오랫동난 집을 잊고 산 기슭에서 잠을 자며 지혜를 다하여 만들고 허물고 하였도다! 그러나 마음이 새롭지 못하여 평정을 구하여 화산(華山:태화산), 북악(北岳:恒山), 태산(泰山), 형산(衡山)에 올랐지만, 마루는 트였으되 일은 쇠퇴하였도다! 이에 신(神)께 제(祭) 올리기에 힘쓰니 막힌 것과 어두움이 물러가고, 남쪽 강의 허물이 벗겨져 형통하게 되어, 입을 것이 만들어지고 먹을 것이 마련되었도다! 온 나라가 안녕할지며, 백성들이 춤추는 시대여 영원하여라! 

13) 천자 순(舜)이 반역(反逆)하다 

서기전2267년부터 서기전2247년까지 20년 사이에 5년마다 산동지역의 낭야성(琅耶城:가한성)에 설치된 감우(監虞)에 행차하시던 태자부루께서 서기전2246년 이후에 친림(親臨)을 멈추시자, 천자(天子) 순(舜)은 이내 다른 마음을 품게 되었다. 치수와 관련한 과거역사는 잊어버렸던 것이다. 

즉, 순은 서기전2267년 도산회의에서 폐지되었던 유주(幽州)와 영주(營州)를 서기전2246년경에 산동지역에 있던 남국(藍國)의 인근에 다시 설치하였던 것이다. 서기전2267년 이전의 유주 땅에는 이미 고죽국(孤竹國)이 봉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 땅에 다시 설치할 수는 없었던 것이 된다. 

이리하여 천자 순은 더 이상 단군조선의 진정한 천자가 될 자격을 잃게 되었으며, 아버지 유호씨(有戶氏)와 천조(天朝)인 단군조선에 다시금 불효와 불충을 저지른 것이 되었다. 

14) 부루 천왕께서 순의 유주와 영주를 정벌하시다 

서기전2240년에 제2대 천왕(天王)으로 즉위하신 부루(扶婁)께서 천자 순(舜)이 다시 설치한 유주(幽州)와 영주(營州)를 정벌하여 그 곳에 제후를 각각 봉하셨다. 

이후 부루 천왕께서는 단군조선의 사자(使者) 유호씨(有戶氏)로 하여금 순(舜)의 반역을 징벌하라 명하셨다. 이에 유호씨는 곧바로 작은 아들 유상(有象)과 치수에 공이 큰 우(禹)에게 명하여 순을 협공(協攻)하라 명하였다. 

15) 형제전쟁(兄弟戰爭) - 유상과 우가 순을 협공하여 순을 제거하다 

서기전2240년부터 서기전2224년 사이에 천자 순(舜)과 단군조선의 사자 유호씨의 작은 아들인 유상(有象)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니 이를 형제전쟁(兄弟戰爭)이라 부른다. 

순(舜)이 처음 20세에 단군조선의 환부(鰥夫)로서 아버지 유호씨를 따라 당요(唐堯)를 토벌하러 갔다가, 이제 당요의 천자 자리를 찬탈하여 스스로 천자가 되어, 아버지 유호씨와 단군조선에 불효(不孝)와 불충(不忠)을 되풀이하였던 것이다. 

유호씨(有戶氏)의 작은 아들 유상(有象)이 우(禹)와 협공(協攻)으로 순(舜)을 공격하니, 순은 남쪽으로 창오(蒼梧)의 들에 피신하였다. 

서기전2224년에 결국 도망 다니던 순은 우(禹)의 군사들에게 창오의 들에서 죽임을 당하였으며, 순의 두 아내는 강물에 투신자살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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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사무총장. 트위트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의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 예읍의 추장의 후손임을 역사적으로 밝혔음. 
*우비(禹碑, 우 치수기념 부루공덕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여, 서기전2267년 이후 우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긴 것임을 밝혔음. 
*명도전(明刀錢) 최초 해독학자 허대동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 해독의 검증에 참여하여 첨수도,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거기에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문자임을 밝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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