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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 211] 단군조선과 고대중국의 관계역사 7

양해천 2018. 1. 22. 09:42

[홍익인간 211] 단군조선과 고대중국의 관계역사 7

2012년 01월 29일 (일) 10:39:25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단군조선(번한,마한)과 하은주(夏殷周)의 관계역사 1- 

구이(九夷), 동이(東夷), 서이(西夷) 등 이(夷)라는 용어는 단군조선 자체에서 사용한 용어가 아니라 하은주(夏殷周) 등 고대중국이 부른 명칭이다. 즉 이들 명칭은 단군조선의 구족(九族)이자 구한(九桓) 즉 배달나라 구려(九黎) 또는 그 일부를 부른 명칭이 된다. 

고대중국의 기록상으로는 주나라 춘추(春秋)시대 이전에는 단군조선 구족을 구이(九夷)로 적고 있으며, 전국(戰國)시대 이후에는 동이(東夷)라는 명칭으로 쓰고 있다. 이리하여 전국시대에 주(周)나라 시대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서기전1199년경부터 중원(中原)에 자리잡은 은(殷)나라를 기준으로 하여 은나라의 동쪽의 나라를 동이(東夷)라 적게 된다. 

은나라의 서쪽의 제후국인 주나라는 서이(西夷)에 속한 것이 되는데, 서이는 곧 백이(白夷)로서 단군조선의 구족 중의 백족(白族)에 해당한다. 서이 근처에 견이(田犬夷)가 있었는데 주나라 시대에는 이를 견융(犬戎)이라고도 불렀으며 황이(黃夷)의 일파이고, 그 외 기록되고 있는 종융(踵戎) 등은 서이(西夷) 또는 황이(黃夷:黃族)의 일부로서 단군조선 구족(九族)의 일파가 된다. 

한단고기(桓檀古記)의 단군세기(檀君世紀), 번한세가(番韓世家), 마한세가(馬韓世家)에는 하(夏)나라와 주(周)나라는 단군조선에 조공(朝貢)을 하고 침범한 기록이 거의 없으나, 은(殷)나라는 단군조선에 조공을 하면서도 빈번히 단군조선을 침범하다가 정벌을 당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주나라 서주(西周)시대에는 단군조선과 전쟁기록이 보이지 않고,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에 들어서 연나라와 제나라가 단군조선(번조선)의 서쪽 변경에서 단군조선과 전쟁한 기록이 나타난다. 

통상 동이족(東夷族)이라 불리는 은(殷)나라보다 의외로 서이족(西夷族)인 주(周)나라 특히 서주(西周)시대에는 단군조선과 관계가 좋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역사적으로 볼 때, 하(夏)나라는 단군조선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항거하여 단군조선이 가르침을 주기를 포기하면서 시작된 나라이며, 은(殷)나라는 단군조선이 건국을 도운 나라임에도 반역하여 침범하기를 더 자주하였고, 주(周)나라는 동이족 출신의 강태공(姜太公)이 주무왕(周武王)을 도와 세워졌는데, 춘추전국시대의 연(燕)나라, 제(齊)나라 외에는 단군조선과 관계가 거의 우호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군조선과 주나라의 우호적 관계는 공자(孔子)의 7세손(世孫)인 공자순(孔子順:공빈(孔斌))이 홍사(鴻史)의 서문(序文)에서 동이(東夷)와 중화(中華)가 우방(友邦)이었다라고 적은 것으로 보아 사실임을 느낄 수 있는데, 이는 아래위의 질서가 잡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으며, 만약 주나라가 단군조선을 침범하곤 하였다면 당연히 단군조선은 이에 대하여 응징을 하였을 것이다. 

아래에서 [중]으로 표시된 글은 중국사서의 기록이며, [한]은 한국측 사서의 기록이다. 

[단군조선과 하(夏)나라 시대] 

1. 우(禹) 

1) 사공(司空) 우(禹)가 치수를 맡다 

서기전2280년 순(舜)임금 시절에 치수담당이었다가 공을 이루지 못한 책임으로 우산(羽山)에서 처형당한 곤(鯤)의 아들인 우(禹)는 순(舜)임금으로부터 사공(司空)의 벼슬에 봉해져 서기전2288년에 발발한 요순(堯舜)시대 대홍수(大洪水)의 치수(治水)를 맡았다. 곤이 치수를 맡은 서기전2288년부터 처형당한 서기전2280년까지 9년간 대홍수가 계속되었다 하여 소위 요순시대 9년 대홍수라 불린다. 사공(司空)이란 벼슬은 건설담당으로서 지금의 건설부(장관)에 해당한다. 

2) 사공 우가 13년간 치수에 성공하지 못하다 

사공(司空) 우(禹)는 서기전2280년부터 서기전2267년까지 13년간을 치수에 온 힘을 기울였다. 홍수가 난 흙탕물에 직접 뛰어들어 치수를 위한 온갖 방법을 다 모색하였다. 집을 지나쳐도 들어가지 않고 산 기슭에서 잠을 자면서, 둑을 쌓고 허물고 하면서 물바다를 육지로 바꾸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태산(泰山), 형산(衡山), 화산(華山), 항산(恒山)의 산정(山頂)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 보면 아직도 산은 훤히 트여 있으나 산 아래 땅은 보이지 않고 물바다 그대로였다. 

백성들에게는 날이 갈수록 먹을 것이 없어지고 입을 것이 없어지고 잠잘 곳이 없어졌다. 이대로 가면 중원천하의 백성들이 배를 굶고 추위에 떨며 전염병에 걸려 모두 목숨을 잃을 지경이 될 것이었다. 

3) 사공 우가 치수에 관한 가르침을 구하다 

사공(司空) 우(禹)는 13년간을 치수에 힘썼으나, 드디어 스스로 치수를 하는 데는 한계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는 방법을 모색하던 중 회계산(會稽山)에 올라 태호복희(太皞伏羲)의 신전(神殿)에 들러 기도를 올렸다. 그때 사공 우는 단서를 찾아 내었다. 즉, 지혜있는 선인(仙人)을 찾아 방법을 여쭙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사공 우는 자허선인(紫虛仙人)을 찾아 뵙고는 치수에 관한 가르침을 달라 청하였다. 이에 자허선인은 치수법(治水法)을 담은 황부중경(黃部中經)이라는 책이 천조(天朝)에 있음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천조(天朝)의 가르침을 받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그 천조(天朝)는 곧 상국(上國)인 단군조선(檀君朝鮮) 조정(朝廷)을 가리키는 것이다. 

4) 사공 우가 순(舜)임금에게 천조(天朝)에 구원(救援)을 요청하라 간하다 

사공 우는 곧바로 순임금에게 달려가 자신의 치수에는 한계가 있음을 아뢰고 천조(天朝)에 구원을 요청하라 간하였다. 이에 순임금은 고민에 빠졌다. 자신이 불효한 아버지의 나라이며, 자신이 불충을 저지른 임금의 나라에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었다. 스스로 중원천하의 최고 제왕(帝王)의 꿈을 이루려 하였으나 이제 와서 하늘의 도움 없이는 이루지 못함을 깨닫게 되었다. 이대로 가다간 중원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물귀신이 될 것만 같았다. 이에 순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5) 순(舜)이 천제(天帝)께 상소문을 올리다 

사공 우(禹)의 절박하고도 마지막일 것 같은 간청을 들은 순임금은 천조(天朝)의 천제(天帝)께 22년간 지속된 대홍수를 물러가게 해달라며 치수에 관한 구원을 요청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동안 군신의 도리와 부자의 도리를 어겨 가며 중원천하(中原天下)의 자칭 천자(天子)가 된 순(舜)의 소행(所行)을 지켜보며 경계(警戒)하시던 단군왕검 천제(天帝)께서는, “소신의 중원천하(中原天下들) 백성이 또한 천제(天帝) 폐하의 백성이 아니옵니까? 바라옵건대 물바다에 빠진 천제 폐하의 백성들의 목숨을 구하여 주시옵소서!”라는 취지로 글을 쓴 구구절절한 상소문을 읽으시고, 태자부루(太子扶婁)를 부르셨다. 천자 자리 찬탈자 순이 진정한 천자로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6) 단군왕검 천제께서 태자부루에게 중원천하 백성들을 구하라 명하시다 

단군왕검 천제께서는 태자부루에게 중원천하의 백성을 구할 것을 명하셨다. 이에 단군조선의 진한(眞韓)으로서 천제(天帝)의 섭정(攝政)이던 태자부루는 단군왕검 천제로부터 명을 받잡고, 서쪽의 중원천하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고서, 대홍수의 중심지가 되는 도산(塗山)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이때 단군왕검 천제께서는 104세였으며 순은 77세였고 태자부루는 순과 엇비슷한 연세(年歲)였다. 

당시 중원천하의 주변은 단군조선의 직할 영역이나 다름없었다. 즉 서쪽의 서안에서 북쪽의 태원을 거쳐 동쪽의 태산으로부터 다시 남쪽으로 양자강 하류에 걸치는 지역의 밖은 당요(唐堯)와 우순(虞舜)이 설치한 9주 또는 12주에 접하는 땅으로서 당(唐)나라나 우(虞)나라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지역이었으므로, 순의 신하이던 우(禹)가 치수를 마무리 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공 우의 치수에 관한 한계를 극복하는 비결책(秘訣策)을 지니고서, 태자부루는 일행과 함께 행차하여 먼저 번한(番韓)의 수도 험독(險瀆)에 들러 번한 낭야(琅耶)의 영접을 받고, 이곳에서 반달간 머물면서 민정(民情)을 청문(聽聞)하였다. 이후 태자부루는 번한 낭야를 대동하여 남쪽으로 향하였다. 

7) 태산(泰山)에서 천제(天祭)를 올리게 하다 

태자부루는 남쪽으로 태산을 지나면서 (泰山)번한 낭야에게 태산(泰山)에 올라 천제(天祭)를 지내게 명하였다. 이때부터 산동지역의 태산에서 줄곧 천제(天祭)가 행하여졌으며, 후대의 한(漢)나라 때까지 이어졌다. 

특히 주(周)나라 이후 소위 봉선(封禪)이라는 형태로 천제(天帝)가 행해졌다. 하(夏)나라와 은(殷)나라 때는 태산(泰山)이 단군조선의 직할 영역이었으나, 주(周)나라가 되면서 춘추전국 시대에 들어 어느 때인가 태산이 노(魯)나라에 속하였다가 제(齊)나라에 속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이 태산(泰山)에서 진시황(秦始皇)과 한무제(漢武帝)도 봉선을 행하였다. 원래 봉선(封禪)은 천자(天子)가 스스로 천자(天子) 자리에 올랐음을 하늘 천제(天帝)께 고(告)하는 의식으로서 천제로부터 진정(眞正) 천자(天子)로 윤허(允許)받는 의식인 것이다. 

8) 진한(眞韓) 태자부루와 천자(天子) 순(舜) 

태자부루는 번한 낭야와 함께 낭야성(琅耶城)에 들렀다. 낭야성은 가한성(可汗城)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청도(靑島)이다. 태자부루는 이 낭야성에서 천자 순(舜)의 알현(謁見)을 받고 치수에 관한 보고를 받았다. 그리고 협시월(協時月) 즉 시간과 달력을 협의하여 맞추고 율도량형(律度量衡)을 맞추었다. 

태자부루는 진한(眞韓)이자 천제자(天帝子)로서 천왕격(天王格)의 임금이며, 순은 천자(天子)로서 천제(天帝)의 제후인 바, 천제(天帝), 천왕(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순으로 보면 하늘과 땅 차이 가 되는 서열인 것이다. 즉 천자(天子)는 천왕격의 천제자(天帝子)가 아니라 천제(天帝)의 자작(子爵)이라는 제후(諸侯)가 되는 것이다. 

태자부루는 다시 일행을 거느리고 도산(塗山)으로 향하였다. 이에, 천자 순(舜)은 사공 우(禹)에게 명하여 도산회의(塗山會議)에 참석하여 가르침을 받도록 조치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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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1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사무총장. 트위트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의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 예읍의 추장의 후손임을 역사적으로 밝혔음. 
*우비(禹碑, 우 치수기념 부루공덕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여, 서기전2267년 이후 우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긴 것임을 밝혔음. 
*명도전(明刀錢) 최초 해독학자 허대동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 해독의 검증에 참여하여 첨수도,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거기에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문자임을 밝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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