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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 213] 단군조선과 고대중국의 관계역사 9

양해천 2018. 1. 22. 09:44

[홍익인간 213] 단군조선과 고대중국의 관계역사 9

2012년 01월 31일 (화) 10:20:43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단군조선(번한,마한)과 하은주(夏殷周)의 관계역사 3- 

[단군조선과 하(夏)나라 시대] 

16) 하나라 제1대왕 우(禹) - 우(禹)가 반역하여 자칭 하왕(夏王)이라 하다 

순을 제거한 후 서기전2224년에 우(禹)는 돌연 마음을 바꾸어 유호씨의 명을 받지 않고 몰래 군사를 모으고 무기를 보수하고서는 하왕(夏王)이라 참칭(僭稱)하였다. 즉, 우는 자칭(自稱) 천자에 불과하며, 정식 천자(天子)로서 인정받지 못하였던 것이 된다. 우는 사공 시절에 단군조선의 태자부루로부터 전수받았던 홍범구주(洪範九疇)의 가르침을 악용하여 자신의 권력욕(權力慾)에 활용한 것이 된다. 하왕(夏王)을 하후(夏后)라고도 하는데, 후(后)는 임금이라는 말로서 왕(王)과 같다. 

우(禹)는 도산(塗山)에 수도를 정하고서 단군조선의 법제도(法制度)를 흉내내어 함부로 제후(諸侯)를 봉하고 조공(朝貢)을 받는 등 폭돌한 정치를 펼쳤다. 이에 수 많은 백성들이 도망쳐 단군조선의 영역으로 피하였다. 그러자, 우는 국경을 봉쇄하여 백성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에, 유호씨는 도산에 수도를 정한 우(禹)에게 권사(權士) 등 사자(使者)를 보내어 가르침을 내려 주었다. 즉 우에게 당요(唐堯)의 전철을 밟지 말 것을 경고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는 이를 도리어 모욕(侮辱)이라 하여 전쟁을 불사하였다. 

유호씨는 어쩔 수 없이 군사를 움직여 우(禹)를 토벌하였다. 그러자, 우는 모산(茅山)으로 옮기고 진지(陣地)를 구축하였다. 모산은 지금의 회계산(會稽山)이다. 

이리하여 서기전2224년부터 서기전2195년경까지 약 30년간 단군조선 사자(使者) 유호씨(有戶氏)와 하(夏)나라의 전쟁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서기전2198년경 우(禹)는 진중(陣中)에서 병들어 사망하였다. 우(禹)가 9년간 다스리고 병이 들어 서기전2215년경에 백익(伯益)에게 섭정을 맡겼던 것이며, 백익은 서기전2198년에 우(禹)의 아들 계(啓)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2. 하나라 제2대왕 계(啓) 

서기전2197년에 계(啓)가 왕이 되어서도 아비 우(禹)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그 아비와 그 아들이라 오히려 유호씨(有戶氏)가 도(道)를 어지럽힌다 하여 전쟁을 불사하였다. 

계(啓)가 대군을 이끌고 유호씨가 머문 감(甘)이라는 읍(邑)으로 진격해 오다가, 유호씨가 이끄는 수천의 군사에게 오히려 매번 패하기만 하였다. 이에 계는 두려워서 퇴진하여 다시는 공격하지 못하였다. 

유호씨는 가르침을 주려 하여도 받지 않고 우매(愚昧)하여 전쟁만을 일삼는 계(啓)와 그 하나라 백성들이 눈이 먼 것을 보고는, 고치기가 어렵다고 생각하여 오히려 서남(西南)의 제족(諸族)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서기전2195년경에 군사를 물리니 감읍(甘邑)이 자연히 없어졌다. 이를 두고 하나라 역사에서는 계왕이 유호씨의 감(甘)을 쳐서 이겼다라고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감(甘)은 섬서성(陝西省)에 있으며 서안(西安)과 낙양(洛陽) 사이에 위치하였던 것이 된다. 서남의 제족은 파미르 서쪽과 남쪽 지역으로 분거하여 사는 백소씨족(白巢氏族)과 흑소씨족(黑巢氏族)으로서 마고할미의 후손들을 가리킨다. 

계는 서기전2197년부터 서기전2189년까지 9년을 재위하였다. 

3. 하나라 제3대왕 태강(太康) 

태강(太康)은 서기전2188년부터 서기전2160년까지 29년 재위하였다. 

[중] 서기전2188년~서기전2159년 "태강(太康)이 덕을 잃어 이인(夷人)들이 처음으로 반역하였는데, (중략) 태강은 계의 아들이며, (중략) 놀기만 하고 100일동안 돌아오지 않으면서 백성들을 돌보지 아니하니 예(羿)가 쫓아 낸 바 되었다"<후한서 동이열전 後漢書 東夷列傳> 

태강이 덕을 잃었다라 함은 태강이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잘못하였다는 말이 된다. 

이인(夷人)들이 반역하였다는 것은 이인들 즉 구이(九夷)가 하나라를 견제하여 나라를 접수하려고 군사를 움직였다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하나라는 서기전2224년경 우가 자칭 하왕(夏王)이라 하면서 단군조선을 배신하고 세우 나라인데, 제2대왕인 계(啓)에 이르러 그 백성들이 단군조선의 사자이던 유호씨(有戶氏)에게 강력히 항거하므로, 유호씨는 군사를 물리고 가르침을 주는 것을 포기하였다. 

이후, 태강의 시기에 이르러 태강이 정치를 잘못하니 주위에서 견제하고 있던 단군조선의 일부세력들이 다시 하나라를 접수하려고 침공하였던 것이며, 태강이 정치를 잘못 하므로 신하인 예(羿)가 태강을 왕위에서 쫓아내고 중강(仲康)을 세웠다는 것이 된다. 

4. 하나라 제4대왕 중강(仲康) 

중강은 서기전2159년부터 서기전2147년까지 13년 재위하였다. 

5. 하나라 제5대왕 상(相) 

후상(后相)은 일명 왕상(王相)이며, 서기전2146년부터 서기전2119년까지 28년 재위하였다. 

[중] 서기전2146년 "후상(后相) 1년(서기전2146) 회이(淮夷)를 정벌하였다"<竹書紀年> 

[중] 서기전2145년 "후상(后相) 2년(서기전2145) 풍이(風夷)와 황이(黃夷)를 정벌하였다"<竹書紀年> 

[중] 서기전2145년 "후상(后相) 2년(서기전2145) 황이(黃夷)를 정벌하였다"<후한서 동이열전> 

풍이와 황이는 회대(淮岱)의 땅에서 하(夏)나라에 접하여 둘러싸고 있는 구이(九夷) 중 일부로 동이(東夷)에 속한다. 풍이를 남이(藍夷)라고도 하고, 황이(黃夷)는 분파하여 황이(黃夷), 양이(陽夷), 우이(于夷), 방이(方夷), 견이(畎夷)가 되었다. 

태호복희의 후손들이 풍족(風族)으로서 풍이(風夷)이며, 하(夏)나라 시조인 우(禹)를 풍이출신이라고도 한다. 남이(藍夷)는 치우천황의 후손들이 되며, 풍이와 남이는 곧 구이 중 중국내륙의 동이(東夷)에 속한다. 풍이를 남이와 혼용하기도 하는데, 이는 풍이지역이 곧 남이지역이기 때문이다. 즉, 서기전3500년경 이후 태호복희 후손들이 살던 땅이 서기전2700년경 이후 치우천왕이 수도를 삼은 산동지역의 서부와 같은 지역이 되는 것이다. 

[중] 서기전2140년 "후상 7년(서기전2140) 우이(于夷)가 내빈(來賓)하였다"<죽서기년><후한서 동이열전>. "견이(畎夷)가 내빈하였다"<通鑑前編> 

우이와 견이도 구이(九夷)의 일부인데 모두 황이(黃夷)에서 분파된 이족(夷族)이다. 우이는 동이(東夷)로서 하(夏)나라 동쪽 멀리 개마(蓋馬)의 동쪽에 사는 이족이다. 개마는 백두산지대을 가리킨다. 즉 개마가 지금의 백두산지대를 가리키는 것인데, 우이는 백두산의 동쪽에 있는 동이족이고, 단군조선 9봉후국의 하나인 예(濊) 땅에 사는 것이다. 이 예는 단군조선 초기에 여수기(余守己)가 봉해진 나라이고 여수기는 구가(狗加)를 지낸 인물이다. 

견이는 처음에는 속말(송화강) 서쪽에 살고 있었는데, 서쪽으로 이동한 황이(黃夷)의 분파족으로서 하나라와 은나라의 서쪽이 되는 주(周)나라 근처에서 삼위산(三危山)에 걸쳐 살았다. 즉 견이는 빈, 기(岐)의 땅을 그 근거지로 삼기도 하였다. 주나라는 기주(岐周)라 하여 서이(西夷)에 속한다. 

맹자집주(孟子集註) 이루장구하에서는 주나라 문왕(文王)은 기주(岐周)에서 나고 필영(畢郢)에서 죽으니 서이(西夷) 사람이다라고 하였는데, 기주는 기산(岐山) 아래에 있고 주(周)의 옛 읍(邑)이며, 견이(畎夷)에 가까운 곳이 된다. 즉, 견이는 단군조선의 구이의 하나로 서쪽지역에서 하, 은, 주를 견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기전3897년경 제견(諸畎)의 가한(可汗)이 된 반고가한(盤固可汗)은 배달나라의 천자(天子)에 해당하며, 견이의 후예가 돌궐이고 지금의 터키가 된다. 

견이에 대한 기록으로 보아, 단군조선의 영역에는 서안(西安) 부근이 포함되고 당연히 티벳도 포함되는데, 물론 단군조선은 태원(太原)에서 서안에 걸치는 지역의 이북을 포함하여 동북쪽의 흑룡강, 우수리강, 한반도까지 포함하는 대제국임을 알 수 있다. 

즉, 단군조선은 천산(天山) 동남쪽의 삼위산(三危山)과 태백산(太白山)에서 동북쪽으로 흑수(黑水:흑룡강)까지 배달나라의 대부분 지역을 차지하는 것이 되고, 단지 하, 은, 주 나라의 땅만 빼면 모두 단군조선의 직할영역이라는 것이 된다. 이는 단군조선은 배달나라의 정통을 계승한 구족(九族)의 나라인 점에서 당연한 것이 된다. 공자의 7세손인 위(魏)나라 사람 공빈(孔斌,일명 孔子順)이 지은 홍사(鴻史) 서문(序文)에서도 신인(神人) 단군(檀君)이 구이(九夷)의 추대를 받았다라고 적고 있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내빈(來賓)은 손님으로 방문한 것을 가리키는데, 우이와 견이가 하(夏)나라의 정세를 정확히 파악함으로써 하나라를 견제하고 통제하기 위하여 의례상 방문하였던 것이 되며, 조공(朝貢)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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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사무총장. 트위트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의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 예읍의 추장의 후손임을 역사적으로 밝혔음. 
*우비(禹碑, 우 치수기념 부루공덕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여, 서기전2267년 이후 우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긴 것임을 밝혔음. 
*명도전(明刀錢) 최초 해독학자 허대동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 해독의 검증에 참여하여 첨수도,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거기에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문자임을 밝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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