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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 239] 단군조선 문화제도 6

양해천 2018. 1. 22. 11:20

[홍익인간 239] 단군조선 문화제도 6

2012년 02월 29일 (수) 10:32:06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라. 단군조선 서보(西堡)인 번한(番韓)의 수도 오덕지(五德地) 고찰 

단군조선(檀君朝鮮) 시조 단군왕검(檀君王儉)은 서기전2333년경에 치두남(蚩頭男)을 봉하여 번한(番韓)으로 삼았고, 서기전2311년에는 번한 땅에 요중(遼中) 12성(城)을 쌓았다. 서기전2311년은 당요(唐堯) 시절로서 서기전2314년에 당요가 순(舜)을 등용한지 4년째가 되는 해가 된다. 

서기전2357년에 도(陶) 땅의 제후였던 요(堯)가 유웅국(有熊國:일명 웅국)의 이복형 제지(帝摯)를 멸하고 스스로 천자(天子)가 되어, 마음대로 구주(九州)로써 땅을 나누고, 명협(蓂莢)의 풀에 의지하여 음력(陰曆)으로써 달력을 만들고, 제왕(帝王)의 도(道)를 함부로 주창하고 주변의 나라를 침략하였다. 

이에, 단군왕검은 서기전2333년에 구이(九夷:구족)의 추대에 응하여 조선(朝鮮)을 건국하고서 세상의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하여, 순(舜)의 아버지 유호씨(有戶氏)를 천사(天使)로 삼아 서기전2324년에 요를 깨우치도록 환부(鰥夫), 권사(權士) 등 100여명을 파견하였던 것이다. 유호씨는 환부, 권사 등과 군사 수천을 이끌고 요(堯)를 토벌하기 위하여 접근하였는데, 이에 요는 재빨리 정세를 알아차리고 유호씨를 대접하여 황하물가(河濱)에 머물도록 하니, 유호씨가 이때부터 요의 소행을 감시만 하게 되었다. 

이때 유호씨의 아들 순(舜)은 효자로 이름이 났다. 즉 이때까지 순은 아버지 유호씨의 명령을 고분고분 잘 따랐던 것이다. 그런데, 당요(唐堯)가 다른 뜻이 있어 순을 유혹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순도 요임금에 빌붙기 시작하여 드디어 서기전2314년 순(舜)의 나이 30세에 요임금에게 등용되었다. 유호씨는 순에게 여러번 경고를 하였으나 듣지 않게 되었고, 이때부터 순은 아버지를 떠나 당요(唐堯)에게 협조함으로써 불효자(不孝子)가 된 것이다. 고대중국의 기록에서는 불효자라고만 적고 있지만, 실제로는 아버지에 대한 불효와 환부(鰥夫)의 직책수행을 게을리 하여 버림으로써 단군조선에 대한 불충(不忠)을 저지른 것이 된다. 

이에 유호씨가 단군왕검 천제(天帝)께 상소를 올리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하였던 것이 되며, 이로써 당요(唐堯)와 순(舜)의 역심(逆心)을 경계하여 번한 땅 서쪽에 요중12성을 쌓았으니 서기전2311년경이 된다. 

요중(遼中)이란 요(遼) 안의 땅이라는 말이며, 요(遼)는 멀다라는 말로서 단군조선의 중심인 수도 아사달로부터 멀다라는 말이 된다. 그리하여 요수(遼水)는 당시 지금의 북경 서쪽을 흐르는 영정하(永定河)로서 고대중국 기록에 대요수(大遼水)라 기록되는 강과 대요수인 영정하의 상류지역에 북동에서 남서로 흘러 합류하는 지금의 청수하(淸水河)로서 고대중국 기록에 소요수(小遼水)라 기록되는 강을 합친 명칭이 된다. 지금의 북경은 대요수의 동쪽에 위치하여 당시에는 요동(遼東)이 된다. 요중 12성의 위치로 보아도 영정하가 대요수(大遼水)인 것이 틀림없게 된다. 

이후 서기전2294년에 순(舜)이 당요(唐堯)의 섭정이 되었고, 서기전2288년에 9년대홍수가 발발하여 곤(鯤)이 치수를 담당하였으며, 서기전2284년에 순이 요(堯)를 유폐시키고 천자(天子) 자리를 찬탈하였고, 서기전2280년에 우순(虞舜)이 치수담당 곤을 처형하고 그 자리에 곤의 아들 우(禹)를 앉혀 치수를 맡겼던 것이다. 

번한 땅에는 수도가 5개가 된다. 이는 단군조선이 서쪽에 있는 반역 잠재세력인 당요(唐堯) 등을 경계하여 정세에 따라 수도를 얾기면서 대처하도록 설정한 것이 된다. 처음의 수도는 험독(險瀆)인데, 번조선의 마지막 수도이기도 하며, 위씨조선의 수도이기도 하다. 동서남북중으로 하여 동쪽의 험독에 4개를 더하여 5경을 둔 것이 된다. 

산동반도 남쪽으로 지금의 청도(靑島) 지역에 낭야성(琅耶城)을 쌓았는데 이 성을 서기전2301년에 개축하여 가한성(加汗城)이라고도 부르며, 특히 서기전2267년 도산회의 때 감우(監虞)라는 관청을 두어 우순(虞舜)의 정사를 감독하였던 곳이다. 이후 치수담당 사공 우(禹)가 우순(禹舜)에게 정사를 보고하면 순은 다시 5년마다 1회씩 순행(巡行)하던 단군조선의 태자 부루(扶婁)에게 감우(監虞)에서 치수경과 등의 국정(國政)을 보고하고 조공(朝貢)하였던 것이다. 

우순(虞舜:순임금)은 서기전2267년부터 서기전2247년경까지 약20년에 걸쳐 4번을 소위 사근동후(肆謹東后)하였던 것이 된다. 여기서 동후는 곧 태자부루를 가리키며, 태자부루는 진한(眞韓)으로서 단군왕검의 보좌 겸 섭정 비왕(裨王)이고, 단군왕검 천제(天帝)를 대신하여 나라의 정사를 보았던 것이다. 

번한의 중앙이 되는 안덕향(安德鄕)은 곧 개평(蓋平)으로서 지금의 당산(唐山) 바로 위에 소재하였고, 동북쪽에 탕지(湯池:탕지보)가 있어 이를 구(舊) 안덕향이라 하고 고구려 때에는 안시성(安市城)이라고도 하며, 서쪽에는 한성(汗城)을 두었는데 고구려의 한성(韓城)이 된다. 

번한 오덕지는 첫 수도이자 마지막 수도인 동쪽의 험독(왕검성), 중앙으로 안덕향인 개평, 북쪽의 구 안덕향인 탕지보(안시성), 남쪽의 감우가 있는 가한성인 낭야성, 서쪽의 한성이 되는 것이다. 

단군조선의 번한은 서쪽을 지키는 나라로서 수시로 수도를 번갈아가며 서쪽(요 순 하 은 주)의 정세와 군사적 움직임에 대응한 것이 된다. 

단군조선의 번한 요중(遼中) 12성(城)을 고려하면, 오덕지의 서쪽 수도가 되는 한성(汗城)은 요수가 되는 영정하의 동쪽과 개평의 사이에 위치한 것이 되고, 탕지인 안시성은 지금의 난하 서쪽 유역으로 추정되는데 지금은 난하의 동쪽에 천안(遷安)이라는 지명이 있어 서로 연관이 있는 바, 탕지는 곧 천안의 서쪽 지역으로서 난하 건너 서편에 위치한 것이 된다. 

서기전635년경 연(燕)나라가 동진(東進)을 한 이후로 서기전202년 한(漢)나라 초기에 번한(番韓:番朝鮮)의 경계가 지금의 난하(灤河)까지 이동하게 되었는데, 고구려의 안시성(安市)(은 바로 이 난하 부근의 안시성이며, 고구려 태조 때 쌓은 요서(遼西) 10성도 모두 난하(灤河) 부근과 대요수이던 영정하(永定河)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오덕지 중의 하나로서 남경(南京)에 해당하는 낭야성(琅耶城)은 산동반도 남쪽에 위치하고 있고, 후대에 산동(山東)지역에서 회수(淮水)지역에 걸쳐 활동하던 동이족(東夷族)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이 된다. 

서기전1122년경까지 산동지역은 단군조선의 번한관경에 속하는 땅으로서 청구(靑邱), 남국(藍國), 엄(淹), 서(徐), 회(淮) 등의 나라가 이미 존속하였고, 제(齊)나라가 주나라의 제후국으로 봉해지면서 임치(臨淄)가 제나라의 수도가 되었고 이후 제나라가 팽창하였으나 여전히 동이족의 나라가 주변에 산재하고 있었던 것이 되는데, 특히 서(徐), 회(淮), 엄(淹), 남(藍), 개(介), 래(萊), 양(陽), 우(隅)라는 내륙(內陸) 8이(夷)가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徐)는 서국(徐國)으로서 서이(徐夷)라고 불리며 서기전1000년경에 출현한 서언왕(徐偃王)의 나라이기도 한데, 서기전1236년부터 서기전512년까지 존속한 나리인 것이다. 

서기전680년에 초(楚)나라 문왕(文王)에게 수도를 함락당하고 서산(徐山)으로 이동하였으며, 서기전668년에 제(齊)나라의 속국이 되었다가 다시 세력을 키웠다가 서기전512년에 결국 오나라 합려왕에게 완전히 망하였던 것이다. 회이와 그 분파인 사이(泗夷)는 진시황의 진(秦)나라 때까지 존속하다가 서기전221년에 진시황에 의하여 완전히 흡수되었던 것이 된다. 

엄이(淹夷)는 엄독홀(奄瀆忽)에 있던 나라로서 태산(泰山)을 중심으로 한 나라가 되며, 서기전909년에 단군조선의 제30대 내휴(奈休) 천왕이 청구(靑邱)와 엄독홀에 행차하고 태산에서 천제를 지낸 것을 마지막으로 하여 이후에는 더 이상 기록에 보이지 않는데, 아마도 주(周)나라의 제후국이던 노(魯)나라에 병합되거나 서기전667년에 패자(覇者)가 된 제(齊)나라에 의하여 합병된 것이 되고, 차차 나머지 동이족들의 나라도 제나라나 주변의 주나라 제후국에게 병합된 것이다 된다. 

단군조선 번한 오덕지는 후대에 나타나는 오경(五京)제도의 원류가 된다. 물론 이 5경제도는 오부(五部)나 오가(五加) 제도에서 나온 것이며, 이들 오부나 오가 제도는 곧 파미르고원 시대의 마고성 4보(堡) 1천부단(天符壇) 제도에서 파생된 것이 된다. 보(堡)는 지키는 보루(堡壘)이고, 천부단은 제천단(祭天壇)이다. 

단군조선도 원칙적으로 1천부단 4보를 두었는데, 백두산이 제천단이 있는 곳으로 천부단 자리가 되고, 동에는 예국(濊國), 서에는 번한(番韓), 남에는 마한(馬韓), 북에는 진한(眞韓)을 둔 것이다. 단군조선 삼한제도(三韓制度)로 볼 때 진한, 번한, 마한은 크게 3경제도가 된다. 대진국(大震國:발해)는 5경제도를 두었다. 후신라(後新羅)도 동경인 서라벌 외에 5소경을 두어 5경제도를 본딴 것이 된다. 기본적으로 3경제도는 천지인 삼신사상(三神思想)에서, 5경제도는 동서남북중의 오방(五方)의 오부(五部) 또는 위치와 관련된 1천부단(天符壇) 4보(堡) 제도에서 나온 것이 된다. 

단군조선의 강역으로 볼 때, 동쪽지역에는 침략하는 무리가 없어 그만큼 비중이 약하여 따로이 한(韓)을 봉하지 아니한 것이 되며, 특히 항상 전쟁의 실마리를 제공하던 요순하은주(堯舜夏殷周) 등 서쪽을 경계하던 번한(番韓)의 역할이 컸던 것이 된다. 

번한 5경은 모두 지금의 영정하 동쪽에 있으며 원래의 요동(遼東)지역에 있던 것이 되고, 서기전202년경 이후에는 패수(浿水)인 난하(灤河) 동쪽에 위치한 험독(險瀆)을 제외한 4개의 수도는 모두 잃은 것이 된다. 

고죽국(孤竹國)은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서 하(夏)나라 이전부터 존속한 것이 되는데, 하나라는 서기전2224년부터 시작된 나라이므로 고죽국은 서기전2224년 이전부터 시작된 나라가 된다. 고죽국의 위치는, 서기전2311년 요중 12성을 쌓은 이후에 순(舜)이 요(堯)임금을 유폐시키고 천자(天子) 자리를 차지한 후에 요가 설치한 9주 외에 유주(幽州), 영주(營州), 병주(幷州)의 3주를 추가로 설치하였고, 이에 단군조선이 서기전2267년 도산회의(塗山會議)에서 3주 중에서 발해만 유역의 유주와 산동지역의 영주를 폐하여 단군조선의 직할 영역으로 편입시켰는 바, 이때 유주 땅에 고죽국을 봉한 것이 되어, 소위 유주 지역이 된다. 고죽국의 중심은 지금의 북경(北京)과 천진(天津) 지역이다. 실제로 단군조선의 제후국임을 증명하는 증거물인 비파형청동검이 천진지역의 남쪽에서 출토되었는 바, 이는 바로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고죽국의 위치를 말해 주는 것이 된다. 

고대중국의 영역은 제후국인 천자국으로서 그 외곽의 경계가 있지만, 단군조선의 외곽 경계는 없다. 단군조선에서 고대중국의 주변에 일정한 땅을 정하여 제후국을 봉하였던 것이 된다. 즉 고대중국인 당우하은주(唐虞夏殷周)의 둘레에 단군조선의 제후국들이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 된다. 고대중국의 영역은 대략적으로 서안(西安)~태원(太原)~안양(安陽)~한수(漢水) 지역을 큰 원으로 하여 방(方) 3,000리의 넓이가 되어, 방(方) 1,000리의 땅인 주(州)가 9개가 된다. 

이에 반하여, 단군조선의 직할 영역인 삼한관경만 하더라도 방(方) 6,000리의 땅으로서 36주(州)가 되며 고대중국의 영토에 비하면 최소한 4배가 넘는 것이 되고, 단군조선의 외곽지역을 포함하는 동서 2만리, 남북 5만리로 계산하면 약1,000주(州)의 땅이 되어 111배가 넘는다. 

번한 오덕지(五德地)에서 청동거울(靑銅鏡), 청동방울(靑銅鈴), 청동칼(靑銅劍)이 출토될 가능성이 너무나 많다. 즉 험독이 되는 지금의 산해관(山海關) 자리, 서쪽의 한성(汗城:韓城) 자리, 동북의 탕지 즉 안시성 자리가 되는 난하 중하류의 천안(遷安) 부근, 남쪽의 낭야성 자리인 지금의 청도(靑島), 중앙에 해당하는 지금의 개평(蓋平:開平) 부근에서 천부삼인이 되는 청동제품이 출토된다면 바로 단군조선 번한의 역사가 바로 입증되는 것이 된다. 

번한은 단군조선의 삼한의 하나인 비왕의 나라로서 천군(天君) 이상의 천왕격(天王格)에 해당하는 나라이므로, 분명히 단군왕검으로부터 천부삼인을 전수받았다고 보인다. 즉 청동거울, 청동방울, 청동칼을 전수받고 천왕의 명을 받아 해마다 천지인 삼신(三神)에게 제사를 지낸 것이 되며, 주로 오덕지를 비롯하여 산동지역에 있던 태산(泰山)에서 행사를 치른 것이 된다. 서기전2267년에는 태자부루가 도산회의를 주관하러 갈 때 번한 낭야(琅耶)로 하여금 태산에 올라 천제를 지내게 하였으며 서기전909년에 청구의 서쪽에 있던 엄독홀(奄瀆忽)에 속했던 태산에서 천제를 지냈던 것이 된다. 

청구(靑邱)라는 땅은 지금의 산동지역의 중북부에 해당하는 땅이 되고, 배를 타면 번한의 수도인 험독(險瀆) 등에서 그리 멀지 아니한 곳이 된다. 청구의 서남쪽에 남국(藍國:藍夷)가 있고, 그 남쪽에 서이(徐夷), 서이의 남쪽 회수부근에 회이(淮夷)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중국의 태산 부근 또는 산동지역으로부터 회수(淮水)에 걱치는 지역에서 청동거울, 청동방울, 청동칼이 출토될 가능성이 많은데, 최소한 청동칼이 출토될 것은 확실하다. 이미 산동지역에서 출토된 명도전(明刀錢) 즉 제나라의 명도전이라는 소위 제명도(齊明刀)는 대부분이 제(齊)나라의 도전이 아니라 동이족들의 도전이 되는 것이며, 제나라가 동이족들의 도전(刀錢)을 본 따 제나라 땅에 시행한 제법화(齊法化), 제지법화(齊之法化), 연나라를 정복한 기념으로 안이지법화(安易之法化), 제나라가 연나라에 복수하여 연나라를 제압한 기념으로 제반이시결신지법화(齊返易始結信之法化), 제반이결신지법화(齊返易結信之法化) 등을 기념발행 한 것이 된다. 

지금의 북경의 동쪽 지역은 영정하인 대요수(大遼水)의 동쪽으로서 번한 땅이며, 연나라가 안(安)을 거쳐 이(易)로 수도를 옮겼다가 다시 계(薊)로 옮기고, 다시 지금의 북경으로 옮겨 계(薊)라고 할 때까지, 북경일대는 반한관경 내 고죽국(孤竹國)의 영역이었는 바, 서기전226년에 연왕(燕王)이 계(薊:북경)가 되는 요동으로 달아나 서기전222년에 진(秦)나라에 항복하면서, 번한(번조선)과 경계가 되었던 만번한(滿番汗)은 난하(灤河)의 서쪽에 위치하며 고하(沽河)의 동쪽에 위치하는 것이 되는데, 연나라의 유물은 대부분 통상적으로 영정하의 이남에서 출토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실제로 영정하의 남쪽 즉 북경의 서남쪽에 탁주시 부근에 방산현(方山懸)이 있고 여기에 유리하(琉璃河)가 있는데, 이곳에서 연나라 유물이 발굴 되었던 것이다. 

연나라의 산이 되는 연산(燕山)도 실제로는 계(薊)의 동북에 있는 산으로서 난하(灤河)의 훨씬 서쪽에 있으며, 영정하 동쪽에 있는 고하(沽河)와 난하 사이에 있는 것이다. 아마도 연산의 남쪽에 있던 발해만 유역의 지명이 만번한이 아닌가 한다. 난하 중하류 서쪽에 물창고와 같은 호수(湖水)가 많은데 이 지역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 번한 오덕지를 본 따 지금의 서울인 한양(漢陽)을 오덕지(五德地)라 설정하면서 고려의 수도인 송악(松嶽)과 서경인 평양(平壤) 외에 한양을 오덕지로 남경(南京)을 두어야 한다는 취지로 기록되고 있다. 고려는 개경, 서경, 남경의 3경제도를 둔 것이 된다. 

오덕지는 고려시대에 한양(漢陽)의 땅을 동서남북중(東西南北中) 오방(五方)의 오행(五行)에 따른 5가지 덕(德)을 함께 가진 곳이라 의미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기도 하지만, 단군조선 번한의 오덕지는 덕(德)을 갖춘 오방(五方)의 땅으로서의 5경(京)이 되는 것이다. 즉, 고려시대의 오덕지인 한양(漢陽)은 동서남북에 각 위치한 낙산, 인왕산, 목멱산(남산), 북악산을 주변에 둔 중앙의 땅으로서 인의지예신(仁義智禮信)의 5덕(德)을 갖춘 땅이라 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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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총재.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1. 역법(曆法)의 시초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441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2.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던 것임을 밝혔음. 
3.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역(易), 역법(曆法), 음양오행(陰陽五行), 단군조선의 정치행정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4.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혔으며,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음. 
5.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의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격의 천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 우 치수기념 부루공덕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여, 서기전2267년 이후 우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 예읍의 추장의 후손임을 역사적으로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최초 해독학자 허대동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 해독의 검증에 참여하여 첨수도,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거기에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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