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 246] 단군조선 문화제도 13
(다) 병법무예(兵法武藝)
배달나라를 계승한 단군조선에는 군대를 관장한 우(尤)라는 직책을 두었으며, 국방을 담당한 관제로서 구가(狗加)와 마가(馬加)가 있었다. 이로써 이미 배달나라 시대에 군사를 다루는 병법(兵法)과 무예(武藝)가 정립되어 있었던 것이 된다.
서기전2324년에는 단군왕검 천제(天帝)께서 유호씨(有戶氏)를 사자(使者)로 삼아 당요(唐堯)에게 도(道)를 깨우치도록 명하였는 바, 유호씨는 환부(鰥夫), 권사(權士) 등 100여명과 군사를 인솔하여 당요를 토벌하러 갔던 것이며, 이에 당요가 정세를 알아차리고 무조건 굴복하였던 것이다.
서기전2224년에 우(禹)가 반역(反逆)한 이후 약30년에 걸쳐 유호씨가 하우(夏禹)와 그 아들 계(啓)를 토벌하였는데, 계가 수만의 군사로도 수천의 군사 밖에 안되는 유호씨에게 연전연패하였는 바, 전략전술(戰略戰術)의 병법(兵法)이 없을 리 없으며, 체력을 단련하고 병기를 다루는 무예(武藝)가 없을 리 없는 것이 된다. 이는 서기전2700년경 배달나라 치우천왕이 헌원과의 전쟁에서 100전 100승을 한 사실로만 보아도 병법과 무예의 역사는 이미 배달나라 시대부터 이어져 온 것이 된다.
단군조선 시대에 국가의 방비를 위하여 삼한(三韓) 또는 사보(四堡) 제도를 두고, 서기전2301년에 요중(遼中) 12성(城)을 축조한 것과, 수차례의 반란을 진압한 역사와 은탕(殷湯)의 군사와 연락하여 하걸(夏桀)의 군사를 쳐서 멸한 사실과, 서기전1291년 이후 은나라 무정(武丁)의 침공을 격퇴하여 조공을 받거나 서기전1236년에 은나라 땅을 정벌하여 제후국을 봉한 사실 등을 미루어 볼 때, 단군조선에는 이미 병법과 무예가 정비되어 있었던 것이 분명한 것이다.
단군조선 시대의 심신수련 단체인 국자랑(國子郞:천지화랑)은 나라를 지키는 기둥으로서 문예(文藝)와 병법(兵法)과 무예(武藝)를 익히며 심신을 단련한 것이 된다. 또, 지방에서는 소도(蘇塗) 옆에 경당(扃堂)을 두어 미혼의 젊은이들로 하여금 독서(讀書), 습사(習射), 치마(馳馬), 예절(禮節), 음악(音樂), 권박일술(拳撲釰術) 등 육예(六藝)를 익히게 하였으니, 독서, 예절, 음악은 병법(兵法)을 포함한 문예(文藝)에 속하며, 습사, 치마, 권박일술은 무예(武藝)에 속하는 것이다.
서기전1595년 병술년(丙戌年)에 전략가(戰略家) 신우천(新尤天)이 신병서(新兵書) 한 질을 바치니, 제16대 위나(尉那) 천왕이 신우천을 상장(上將)으로 삼았다 하고, 서기전425년 3월에 큰 물이 백악산아사달의 도성을 휩쓸어 버리니 도적들이 큰 혼란에 빠져 구물(丘勿) 천왕이 만명의 군대로 정벌하니 도적들이 저절로 괴멸하여 반란자 우화충의 목을 베었다 하고, 서기전339년에 연(燕)나라가 번조선의 안촌홀(安村忽)을 침략하였다가 패하여 대신(大臣)과 공자(公子) 등 자제(子弟)들이 번조선에 인질로 잡혔다는 사실 등에서, 단군조선에 병법과 무예가 없을 리 없는 것이다.
서기전1122년에 세워진 주(周)나라의 최고 건국공신인 강태공(姜太公)이 육도삼략(六韜三略)을 지었다 전하나, 그 병법의 원천은 곧 단군조선이 된다. 즉, 강태공은 은나라 말기에 산동지역의 동해안 출신으로서 단군조선의 번한 관경에 속한 청구국(靑邱國) 출신이 되며, 단군조선의 병법을 약 80세까지 익히고 서백(西伯)이던 창(昌:주문왕 추존)을 찾아가 등용되었고, 이어 주무왕이 된 발(發)을 보좌하여 폭정을 펼치던 은나라 주왕(紂王)을 쳐서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건국하게 하였던 인물이다.
(라) 단군조선과 고대중국의 변경인 요수(遼水)지역 고찰
1) 번한(番韓) 요중(遼中) 12성
요중(遼中) 12성(城)이란 요동(遼東)과 요서(遼西) 지역에 있는 12성이라는 말이며, 서기전2301년 당시의 요수(遼水)는 바로 지금의 북경 부근을 흐르는 영정하(永定河)가 된다. 곧 이 영정하는 대요수(大遼水)이며 이에 합류하는 소요수(小遼水)는 북동 지역에서 남서 방향으로 흘러 지금의 장가구(張家口) 부근에서 합류하는 청수하(淸水河)이다.
그리하여, 요중 12성 중에서 영지성(永支城)과 여성(黎城)은 요서지역에 있는 것이 되고, 험독, 탕지, 통도, 거용, 한성, 개평, 대방, 백제, 장령, 갈산은 요동지역에 위치한 것이 된다.
2) 서기전202년에 요수가 된 패수(난하)
서기전202년 한(漢)나라의 연왕(燕王) 노관(盧綰)과 번조선(番朝鮮)이 국경으로 삼은 패수(浿水)인 지금의 난하(灤河)를 기준으로 하게 되면, 험독, 갈산, 장령은 요동지역이 되며, 탕지, 통도, 여성, 영지, 거용, 한성, 개평, 대방, 백제는 요서지역이 된다.
패수가 되는 난하를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는 강으로 삼은 것은 우리 기록에 의하면 단군조선 말기인 서기전365년으로 소급하게 되는데, 실제로는 패수를 한(漢)나라와 국경으로 삼은 서기전202년 이후가 되며, 한편 고대중국에서는 요동과 요서의 구분선이 이후에도 계속 대요수이던 영정하로 기록된다.
3) 고구려의 요수는 패수(난하)
그리하여 고구려(高句麗)는 패수인 지금의 난하(灤河)를 요동과 요서의 구분선으로 하였으며, 태조무열제(太祖武烈帝)가 요서(遼西) 10성을 쌓았는데, 이때 요동성(遼東城)만 요동에 있는 것이 되고 나머지는 요서지역에 있었던 것이 된다.
고구려의 요서 10성은, 안시(安市), 석성(石城), 건안(建安), 건흥(建興), 요동(遼東), 풍성(豊城), 한성(韓城), 옥전보(玉田堡), 택성(澤城), 요택(遼澤)이다.
안시성은 번한 요중12성 중의 탕지(湯池)로서 개평(開平)의 동북쪽 70리에 있어 난하의 중하류 서편에 위치하고, 요동성은 창려(昌黎)의 남쪽 증 갈산(碣山) 즉 갈석산(碣石山) 부근에 위치한 것이 되며, 한성(韓城)은 번한 요중 12성의 하나인 한성(汗城)으로서 풍성(豊城)의 남쪽 200리에 위치하고, 건안은 안시성의 남쪽 70리에 위치하며, 석성은 건안의 서쪽 50리에 위치하고, 건흥은 난하 서쪽에 위치하며, 풍성은 안시성의 서북 100리에 위치하며, 옥전보는 옛 요동국이라 하는데 영정하의 하류지역으로서 영정하의 바로 동쪽이자 한성(韓城)의 서남쪽 60리에 위치하는 것이 되고, 요택과 택성은 옥전보의 남쪽의 발해만 유역에 위치하는 것이 되는데 요택은 옛 황하북류(黃河北流)의 좌안(左岸) 즉 왼쪽 언덕에 위치하고 택성은 요택의 서남쪽 50리에 위치한 것이 된다.
특히, 옥전보는 지금도 개평(開平)의 서북쪽에 이름이 남아 있어 고구려의 요서 10성 중의 옥전보인지는 확실하지 아니한데, 고구려의 옥전보는 지금의 옥전보보다 더 서남쪽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의 요서10성은 모두 영정하의 동쪽에 위치하면서 난하의 서쪽에 위치하여 요서지역에 있는 것이 되고, 단지 요동성만 난하의 동쪽에 있는 갈석산 부근에 위치하여 요동지역이 된다.
지금의 요동반도 서쪽을 흐르는 요하(遼河)는 서기980년경 요(遼:거란)나라가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이던 임황(臨潢)에서 수도를 지금의 요동반도 동쪽으로 옮기고, 요나라 수도가 있던 지금의 난하인 소위 요수를 동쪽으로 옮겨 붙인 명칭이 되므로, 지금의 요하는 고구려 이전의 요동과 요서의 구분선이 아닌 것이다.
원래 요동과 요서의 구분선은 바로 대요수(大遼水)이던 영정하(永定河)이며, 서기전202년 이후에는 우리 역사에서는 패수가 되는 난하를 기준으로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였던 것이고, 고대중국은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영정하를 기준으로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였던 것인 바, 기록을 세심히 살펴 연대기적으로 요동과 요서를 명확히 구분지어야 하는 것인데, 서기전202년 이후에는 우리 기록에서는 영정하와 난하 사이를 요서로 기록하며, 중국기록에서는 계속 요동으로 기록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다.
옛 요동국이 위치하였다는 옥전보는 대요수이던 영정하 하류의 동쪽에 있었던 것이 되며, 원래 연(燕)나라는 요서지역에 있었으나 고죽국을 차지함으로서 요동지역까지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고, 이후 이 요동국은 요서지역이 되었던 것이 되는데, 번조선이 연(燕)나라와 전쟁을 하면서 땅을 잠식당하여 서기전365년 이후 우리기록에서는 서기전202년에 한나라의 연왕 노관과 경계를 삼았던 난하(灤河)를 기준으로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여 소급하여 기록한 것이 된다.
4) 요서(遼西)지역
가) 영지성(永支城)
단군조선의 번한 요중12성 중의 하나인 영지(永支)는 고죽국의 수도가 되는 곳에서 서북쪽에 위치한 것으로 기록되는데, 고죽국의 중심지가 지금의 북경(北京)과 천진탁수(涿水) 지역이 되고 수도는 지금의 탁수(涿水) 북쪽에 있었던 것이 된다. 그리하여 영지는 곧 탁수의 지류 중 유수(濡水)라 불리던 강의 최상류 지역에 위치한 것이 되며, 서기전2267년경 고죽국이 봉해지기 이전인 서기전2301년에 이미 영지성이 완성되었던 것이고, 고죽국이 봉해진 이후에는 고죽국 관할에 속하는 성(城)이 되는 것이다.
나) 기후국(箕侯國:서화)과 선우중산국(鮮于中山國)
서기전650년경 기자(箕子)의 후손들은 처음 망명지였던 서화(西華:태원~대동~태항산)에서 동쪽 또는 동북쪽으로 이동하여 번조선에 정착한 것이 되는데, 기자족(箕子族)을 특히 수유족(須臾族)이라 한다. 후대에 서화의 남쪽에는 기자의 또 다른 후손의 나라인 선우중산국이 있었는데(燕)나라와 조(趙)나라 사이에 있었다. 선우씨는 기자의 차자(次子) 족속이 된다.
마한세가(馬韓世家)에서는 은나라 기자 서여가 서화(西華) 즉 태항산맥 서북으로 거처를 옮겼다 하고 기록하고 있는데, 태항산은 바로 북경의 서쪽에 위치하며 대동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기자의 망명정착지는 바로 태원(太原) 북쪽의 대동(大同)에서 태항산(太行山)에 걸치는 지역이 된다. 기자의 정착지인 서화의 동쪽 즉 태항산 동쪽에는 바로 고죽국(孤竹國)이 있었다. 그러므로 고죽국은 북경과 탁수지역을 중심으로 한 나라가 되고, 발해만을 동해(東海)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된다.
원래 기자(箕子)는 은나라의 자작(子爵)으로서 기(箕)땅에 봉해졌는데, 이 기(箕)는 하남성 개봉부 부근에 있었고, 은나라가 망하고 기자가 망명한 곳은 바로 단군조선 번한관경에 가까운 곳으로서 고죽국의 서쪽에 해당하는 땅이었다. 그래서 쉽게 말하면 기자의 망명지 서화라는 땅은 북경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태항산의 서쪽 넘어에 있었던 것이다.
다) 주나라의 제후국 연(燕)나라
주나라의 제후국 연(燕)나라도 처음에는 하남성에 있는 은나라 제후국 "연(燕)"에서 따온 글자로서 이 "연"을 피하여 "언(匽)"이라 한 것이며, 은 주왕(紂王)의 아들 녹보(祿父)가 난을 일으키고 도망한 곳이 바로 이 언(匽)이라는 땅인데, 바로 북경의 서남쪽 지역으로서 고죽국의 남쪽이자 제(齊)나라의 서북쪽이 되며, 서화(西華)의 동남쪽이고 진(晉)나라와 조(趙)나라의 동쪽 내지 동북이 된다.
서기전1070년경 처음 연나라가 봉해진 곳은 지금의 탁수(涿水) 남쪽으로 석가장의 동쪽 또는 그 사이 땅이 된다.
북경과 석가장 사이에 안국시(安國市)와 이현(易懸)이 있는데, 연나라의 원래 이름인 "언(匽)"은 "安"과 "易"과 같은 뜻을 가진 글자로서 연나라의 수도였다가 서기전650년경 고죽국이 망하면서 연나라가 수도를 지금의 탁수지역으로 천도하여 계(薊)라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서기전226년 연(燕)나라 말왕 희(熙)가 진(秦)나라 군사를 피하여 도망한 요동(遼東) 땅이 지금의 북경(北京)으로서 명칭을 계(薊)라 한 것이 된다.
(마) 번한(番韓:번조선:番朝鮮)과 연(燕)나라의 경계
1) 탁수(涿水)
서기전650년경 고죽국과 기후국이 연(燕)나라의 구원요청으로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이끌던 제(齊)나라 군사에게 망하기 이전에는, 번조선에 속하던 고죽국과 주나라 제후국인 연나라의 국경은 지금의 탁수(涿水)로 추정된다. 탁수는 유수(濡水)라 불리던 강이 있으며 이 유수의 최상류에 영지성(永支城)이 소재하고 있었던 것이 된다.
2) 대요수인 영정하(永定河)
서기전650년경 고죽국이 망한 이후에는 번조선과 연나라의 경계는 대요수라 불리던 지금의 영정하였던 것이 되며, 이후 이 영정하와 난하 사이의 땅에는 번조선과 연나라 사이에 여러 차례 전쟁이 있었고 서로 밀고 당기면서 차츰 영정하와 고하(沽河)를 넘어 난하쪽으로 국경이 옮겨진 것이 된다.
3) 고하(沽河)의 상류가 되는 조양(造陽)
서기전365년에 연(燕)나라가 패수인 난하 서쪽 지역을 함락시키고 난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운장(雲障)으로 육박해 왔는데, 이때 진조선, 번조선, 마조선의 연합군이 합공하여 연과 제나라의 군사를 오도하(五道河)에서 쳐부수고 요서지역의 성을 모두 찾았다고 하는 바, 이때의 요서지역은 곧 난하 서쪽 지역이 된다.
서기전343년에는 영정하의 상류에 있는 상곡(上谷)에서 전쟁 한 후 영정하의 동쪽이자 고하(沽河)의 상류가 되는 조양(造陽)의 서쪽을 경계로 삼았던 것이 된다.
4) 만번한(滿番汗)
서기전281년경 연(燕)나라 진개(秦開) 시대에 만번한(滿番汗)을 경계로 하게 되었는데, 만번한은 고하(沽河)의 동쪽에 위치한 지역이 되고, 이때 연나라는 조양(造陽)에서 북경 북쪽에 위치한 창평(昌平:襄平:영평)의 북쪽까지 이어져 있던 장성을 만번한의 북쪽이 되는 지금의 계(薊)의 동북까지 이은 것으로 추정된다.
진(秦)나라는 연나라의 영토를 차지한 것이 되고, 한(漢)나라는 진(秦)나라의 영토를 차지한 것이 되어 진나라 또는 한나라 초기에 번조선과의 경계는 이 만번한이 된다.
5) 패수(浿水)인 난하(灤河)
서기전202년 한(漢)나라 때에는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번조선과의 경계를 패수(浿水)인 난하로 삼았는데, 서기전195년에 노관이 흉노로 망명하고 이때 노관의 신하이던 위만(衛滿)은 번조선에 망명하였던 것이 된다.
이리하여 서기전202년부터 서기전108년에 위씨조선이 한무제에게 망할 때까지 번조선 또는 위씨조선(衛氏朝鮮)과 한(漢)나라와의 경계는 패수인 지금의 난하인 것이다. 그리하여 난하 넘어에 있는 소위 만리장성은 한(漢)나라 이후에 쌓은 것이 된다.
서기전108년경 위씨조선 땅에 설치된 소위 한사군(漢四郡)은, 서기전82년에 한나라가 진번(眞番)과 임둔(臨屯)을 폐지하여 낙랑군에 붙였다고 하나 이때 이 진번과 임둔 땅은 북부여에 속하게 되었던 것이 되고, 낙랑군과 현도군은 이후 고구려와 북중국의 나라 사이에 격전장이 되었으며 결국 서기313년에 완전히 밀려나 고구려 땅이 되었던 것이 된다.
(13) 기타 정치제도
(가) 신원목(伸寃木)
서기전1946년에 제10대 노을(魯乙) 천왕 시대에 궁문 밖에 신원목을 설치하고 백성들의 억울한 사연을 들었다라고 기록되고 있다.
이 신원목 제도는 후대의 신문고(申聞鼓) 제도와 상통한다.
(나) 호구조사(戶口調査)
서기전1666년 제14대 고불(古弗) 천왕 시대에 관리를 사방에 내보내어 호구조사를 하도록 하니, 총 1억 8,000만명이 되었다라고 기록되고 있다.
단군조선은 삼한관경만 36주(州)에 해당하는 나라이며, 1주(州)는 가로와 세로 가 1,000리의 땅인데 36주는 가로와 세로가 각 6,000리가 된다.
1억 8,000만명이 단군조선 관할에 속하는 총인구인지 삼한관경 내에 속하는 총인수인지 불명인데, 삼한관경의 총인구라고 보면, 36주에 1억 8,000만명이 되어 1주(州)에 평균 500만명이 사는 것이 된다.
만약, 동서 2만리와 남북 5만리라는 단군조선 전체영역으로 계산하면 1,000주(州)에 해당하는 땅에 1억 8,000만명이 되며, 이에는 고대중국인 은(殷)나라의 인구도 포함되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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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총재.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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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1. 역법(曆法)의 시초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441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2.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던 것임을 밝혔음.
3.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역(易), 역법(曆法), 음양오행(陰陽五行), 단군조선의 정치행정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4.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혔으며,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음.
5.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의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격의 천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 우 치수기념 부루공덕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여, 서기전2267년 이후 우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 예읍의 추장의 후손임을 역사적으로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최초 해독학자 허대동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 해독의 검증에 참여하여 첨수도,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거기에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