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뿌리를 찾아서)/홍익인간 7만년 역사

[홍익인간 261] 단군조선 문화제도 28

양해천 2018. 1. 22. 11:39
[홍익인간 261] 단군조선 문화제도 28
2012년 03월 23일 (금) 08:33:14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마. 조세제도 

단군조선 시대의 조세제도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세율에 관한 기록이 있어 당시에 시행되었던 조세제도가 백성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게 된다. 

백성으로부터 거두어들이는 세금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며, 군후국(君侯國)들이 중앙조정에 바치는 세금도 일률적으로 일반 백성들이 내는 세율과 같았는지 알 수 없으나, 별도로 일정한 세율이 적용되었을 수도 있다. 

단군조선의 기본 조세제도는 정전법(井田法)에 따른 1/9의 세율이 된다. 이 정전법은 서기전1122년에 시작되는 고대중국의 주(周)나라 시대의 조세제도로도 기록되고 있는데, 우물 정(井)의 모양으로 농지를 나누어 8방의 백성들이 농사짓게 하고 중앙의 1에 해당하는 땅은 공동으로 농사를 짓게 하여 그 생산물을 세금조로 내게 하는 것이다. 

1/9의 세율은 약11%에 해당하는 것이 되어 지금의 부가가치세 10%나 기독교에서 헌금을 내는 십일조(1/10:10%)와 유사한 세율이 된다. 

그런데, 단군조선은 홍익인간을 실현하는 나라로서 백성들의 삶의 행복을 우선시하였으므로, 서기전1993년 제8대 우서한(于西翰) 천왕이 1/20의 세율로 세금을 내도록하는 법을 정하였다. 이로써, 있는 곳과 없는 곳이 서로 부족한 것을 보충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1/20의 세율은 5%에 해당하여 1/9나 십일조에 비하면 파격적인 세율이 된다. 

더 나아가 서기전1661년에 제15대 대음(代音) 천왕은 1/80의 세율로 세금을 내도록 정하였다. 1/80의 세율은 1/20의 세율의 1/4에 해당하는 바, 1.25%에 해당하여 아마도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한 세율이 아닌가 한다. 

바. 조선(造船)의 역사 

배를 만드는 역사는 이미 배달나라 시대부터 있었던 것이 된다. 단군조선 시대에는 배만드는 조선소를 건립하여 배를 만든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서기전2131년에 배 만드는 곳을 살수(薩水)에 설치하였다. 이때 마한(馬韓)에서는 장정 30인을 파견하여 살수에서 배를 만들도록 하였다. 살수는 단군조선의 진한(眞韓) 땅에 속하는 지금의 요동반도에 남쪽으로 흐르는 강이 되는데, 지금의 압록강과 지금의 요하 사이에 있는 것이 되며, 지금의 요동반도 남쪽의 바다를 단군조선 시대에는 진한의 남해안(南海岸)이라 한 것이 된다. 

서기전1846년에는 송화강 기슭에 작청(作廳)을 세워 배와 배에 관련된 물건을 만들게 하였는데, 이러한 물건들이 크게 유행되었다. 배에 관련된 물건은 노, 돛 등이 된다. 이때 이외에도 기후천문관측기, 전쟁무기, 악기, 생활용구 등 많은 발명품들이 만들어졌다. 서기전1410년에도 송화강 남쪽 기슭에 조선소를 세웠다고 한다. 

배를 이용한 역사기록으로, 서기전667년에 협야후 배반명이 마한에서 전선 500척을 이끌고 지금의 일본 땅인 삼도로 가서 반란을 진압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전선500척이면 최소한 5,000명 이상이 타고 간 것이 될 것이다. 

또, 서기전426년에 융안의 우화충이 일으킨 반란 때에 제43대 물리 천왕이 배를 타고 도피하였으며, 서기전194년에 번조선왕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의 속임으로 나라를 빼앗기로 배를 타고 지금의 한반도 땅인 마한(馬韓) 땅으로 피한 역사가 있다. 

사. 구휼법(救恤法) 실시 

홍익인간 시대인 단군조선 시대에 구휼법이 시행되고 있었다. 서기전2333년경 단군왕검 천제(天帝)께서 백성들에게 내린 천범(天範) 8조와 참전계경(參佺戒經)에도 있듯이 빈궁하거나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구휼법이 있었던 것이다. 

단군조선 시대에 구휼법을 시행한 대표적인 예로, 서기전1660년에 홍수가 크게 일어나 민가가 크게 해를 입었는데, 이때 제15대 대음(代音) 천왕은 곡식을 창해사수(蒼海蛇水)의 땅으로 옮겨 백성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었던 일을 들 수 있다. 즉, 이때 홍수가 일어난 곳은 창해사수의 땅이 되고, 다른 지역에 있던 곡식을 창해사수의 땅으로 가져와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준 것이 된다. 창해사수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 곳인지 불명이나, 창해(蒼海)로 볼 수 있는 곳은 지금의 발해만, 산동반도 동쪽 바다, 지금의 동해가 되는데, 창해사수의 땅은 백두산의 동쪽으로 동해(東海)에 가까운 두만강, 우수리강 지역이 될 것이다. 

또, 서기전990년에는 큰 가뭄의 끝에 큰 비가 내려 백성들이 수확이 없게 되었는데, 제27대 두밀 천왕이 명을 내려 창고를 열어 널리 나누어 주도록 한 역사도 있다. 

이처럼 백성들이 홍수나 가뭄 등의 천재지변으로 곤궁에 처하였을 때 나라에서 주도적으로 곡식을 나누어 주어 구휼하였던 것이 된다. 

아. 생활용품 발명 

단군조선 시대에 절구(臼), 띠풀지붕, 한지(韓紙), 칡옷, 지남차(指南車), 목행마(木行馬), 석고(石鼓) 악기 등의 생활용품 등이 많이 발명되었다. 

곡식을 찧는 절구(臼)와 띠풀(茅)로 지붕을 만들게 한 사람은 고려 왕씨의 선대가 되는 일토산(一土山) 사람 왕조명(王朝明)인데, 왕조명은 서기전1879년경 사람으로서 황제헌원(黃帝軒轅)의 17세손이라 전하고, 왕수긍(王受兢)의 약20대조가 된다. (殷)은 기자(箕子)의 사사(士師)이던 왕수긍은 서기전1122년경 사람이며, 왕수긍의 약7세손으로서 상형문자인 부예(符隸)와 이두법(吏讀法)을 정리한 왕문(王文)은 서기전925년경 사람이고, 신라시대 차무일(車無一:왕림)은 왕조명의 54대손이 된다. 

고려 왕씨의 본향인 일토산(一土山)은 평양(平壤)이라고 하는데, 단군조선 시대와 북부여 시대의 평양은 해성(海城)으로 심양(瀋陽:장당경)의 남쪽에 위치한다. 한편, 현재의 평양은 단군조선 마한(馬韓)의 수도인 백아강(白牙岡)이며 달지국(達支國)이 있던 땅이다. 

절구(臼)는 서기전1879년에 왕조명이 박(泊)땅의 민장(民長)이 되어 다스리면서 발명한 것으로 곡식을 빻는 나무로 만든 기구인데, 단군조선의 화폐가 되는 소위 명도전에 절구 모양과 절구라고 읽히는 글자가 새겨져 있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 절구라는 글자는 소위 명도전이 주조될 당시에 사용되고 있던 글자가 된다. 

띠풀은 띠(茅)를 말하며 서기전7197년경에 파미르고원의 마고성(麻姑城)에서 사방분거할 당시에, 마고의 장손이던 황궁씨(黃穹氏)가 마고(麻姑)에게 복본(複本)의 맹서를 하며 사죄(謝罪)를 올릴 때 사용한 풀로서 제사의식(祭祀儀式)에 사용된다. 서기전1879년에 왕조명이 백성들에게 띠풀을 뽑아 지붕을 이게 하는 법을 가르쳤던 것이 된다. 

한지(韓紙)는 우리 고유의 종이로서 닥나무 껍질로 제조한다. 서기전1420년에 공장을 세우고 닥종이를 만들었다 하니 이미 한지제조법이 정립되어 있었던 것이 된다. 후한 시대 채륜이 종이를 발명하였다는 역사는 종이제조법을 내놓은 것에 불과하며, 이러한 종이제조법의 원천은 단군조선 시대부터 이미 있었던 것이 된다. 

칡옷(葛衣)은 칡의 줄기 껍질로 만든 옷이 되는데, 칡의 껍질을 벗겨 부드럽게 한 후 잘게 실을 뽑아 베를 짜서 만든 옷이 된다. 삼베옷을 만드는 원리와 같다고 보면 될 것이다. 서기전1420년에 칡껍질로 베를 짠 옷을 입기 시작하였다. 

지남차(指南車)는 서기전1391년에 황운갑(黃雲甲)이라는 사람이 발명하였다 하는데, 지남철(指南鐵) 즉 자석(磁石)을 이용하여 진행방향을 알 수 있도록 만든 수레가 된다. 물론 서기전2698년경 이후에 황제헌원이 치우천왕과 전쟁할 때 지남차를 전쟁용구로 제작한 것으로 전하는데, 연전연패하던 황제헌원이 전투중에 불리할 때 도망할 방향을 잡기 위하여 창안한 것이 될 것이다. 

목행마(木行馬)는 나무로써 말 모양을 만들어 걷거나 움직이도록 만든 것이 되며, 서기전1391년에 황운갑(黃雲甲)이라는 사람이 발명하였다 하는데, 약450년전인 서기전1846년에 이미 목류마(木流馬)라는 발명품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정확히 어떤 원리에 의하여 걷게 만든 것인지는 불명이나, 목마 내부에 사람이 힘을 가하여 바퀴를 굴리거나 걷도록 만든 장치가 있는 것이 된다. 역사상 지중해 연안에서 벌어졌던 트로이 목마 전쟁은 서기전1100년경에 있었던 것이 되는데, 단군조선에서 등장한 목마보다는 약300년 또는 약 750년 뒤가 된다. 

석고(石鼓)는 돌로 만든 악기로서 편경(編磬)의 일종이 될 것이다. 단군조선 초기인 부루 천왕 시절에 어아가(於阿歌)가 있었으며, 단군조선 시대에 천웅(天雄)의 악(樂)을 연주하였다 하는 바, 청동으로 만든 방울(鈴), 소가죽으로 만든 북(鼓), 대나무 등으로 만든 피리(音), 돌로 만든 악기 등 여러종류의 악기들이 이미 있었던 것이된다. 

자. 만국박람회(萬國博覽會) 

단군조선이 건국된 지 약500년이 흐른 서기전1864년에 지금의 박람회와 같이 장소를 마련하여 각 지역의 생산물들을 모아 열람케 하였는데, 천하(天下)의 열국(列國)들이 모여들어 진열된 것이 산과 같이 많았다고 기록되고 있다. 이 만국박람회는 단군조선 시대에 매 10년마다 열었다는 신시(神市)와도 관련된다. 

차. 과학발명 대회와 수상(受賞) 발명품 

서기전1846년에 송화강(松花江) 가에 작청(作廳)을 설치하여 배와 각종 기계를 만들었는데, 여기에서 상(賞)을 받은 발명품으로는 양우계(量雨計), 측풍계(測風計), 자행륜차(自行輪車), 경기구(輕氣球), 자발뇌차(自發雷車), 천문경(天文鏡), 조담경(照膽鏡), 구석편(驅石鞭), 자명종(自鳴鐘), 경중누기(輕重漏器), 연적(涓滴), 발뇌동용기(發雷動舂器), 소금(素琴), 천리상응기(千里相應器), 목류마(木流馬), 진천뢰(震天雷), 어풍승천기(御風昇天機), 흡기잠수선(吸氣潛水船), 측천기(測天機), 양해기(量海機), 양청계(量晴計), 측우기(測雨機), 측한계(測寒計), 측서계(測暑計), 황룡선(黃龍船), 양수기(揚水機) 등이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후대의 역사 속에 등장하는 과학 기구기계들은 이미 있었던 제작법에 관한 기록이나 전수되던 것을 참작하여 재현하여 발전시킨 것일 가능성이 많은 것이 된다. 

특히 양우계, 측우기, 양수기, 진천뢰, 천문경, 자명종, 소금(거문고종류) 등은 눈과 귀에 익은 것들이다. 신라시대 박제상(朴堤上)이 지었다는 징심록(澄心錄)에도 물명지(物名誌)라는 책이름이 있어 그러한 발명품들이 역사적 사실임을 충분히 추론할 수 있는 것이며, 특히 신라시대의 거칠부소사(居漆夫小史)에도 위 과학발명품들에 관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양우계(量雨計)는 비가 내리는 양을 측정하고, 측풍계(測風計)는 바람의 방향이나 풍량을 측정하며, 자행륜차(自行輪車)는 지금의 자전거와 같은 원리로 만들어진 것이 될 것이고, 경기구(輕氣球)는 공기를 이용하여 하늘로 오르는 장치이며, 자발뇌차(自發雷車)는 자동으로 폭발하는 장치를 만든 전차(戰車)가 될 것이고, 천문경(天文鏡)은 하늘을 관찰하는 망원경과 같은 원리로 만든 것이 될 것이며, 조담경(照膽鏡)은 인체내부를 관찰하는 기구로서 지금의 내시경(內視鏡)이나 청진기(聽診器)와 같은 원리가 될 것이다. 

또, 구석편(驅石鞭)은 돌을 멀리까지 날리는 장치가 되고, 자명종(自鳴鐘)은 저절로 울리게 만든 종이나 시계가 될 것이며, 경중누기(輕重漏器)는 물이 새도록 만든 물시계 장치로 보이고, 연적(涓滴)은 붓글씨를 쓰는 데 필요한 물을 공급하는 그릇이며, 발뇌동용기(發雷動舂器)는 폭발장치를 하여 만든 방아 찧는 장치가 된다. 

또, 소금(素琴)은 거문고의 일종이며, 천리상응기(千里相應器)는 거리를 측정하는 장치가 되고, 목류마(木流馬)는 나무로써 말 모양으로 만들어 걷도록 만든 장치가 되며, 진천뢰(震天雷)는 폭발음을 내는 폭탄이 될 것이고, 어풍승천기(御風昇天機)는 바람을 이용하여 하늘을 나는 장치가 되며, 흡기잠수선(吸氣潛水船)은 물속을 오랫동안 잠수할 수 있는 배가 될 것이고, 측천기(測天機)는 날씨나 기후를 측정하는 장치가 될 것이며, 양해기(量海機)는 바닷물의 변화를 측정하는 장치가 될 것이다. 

또, 양청계(量晴計)는 날씨가 맑은 정도를 측정하는 장치가 될 것이고, 측우기(測雨機)는 양우계처럼 비가 내리는 정도를 측정하는 장치가 될 것이며, 측한계(測寒計)와 측서계(測暑計)는 추운 정도와 더운 정도를 측정하는 즉 온도측정 장치가 될 것이고, 황룡선(黃龍船)은 배의 일종이 되며, 양수기(揚水機)는 물을 퍼 올리는 장치로서 논에 물을 대거나 바다부근에서 바닷물을 끌어다 소금을 만들 때 쓰는 양수기가 될 것이다. 

이러한 발명품이 나온지 200년이 지난 서기전1652년에 약수(弱水)에서 고유(膏油)를 채취하였다 하는 바, 여기 고유는 지금의 원유(原油) 즉 석유(石油)가 되는데, 아마도 이미 200년전에 발명되었던 양수기(揚水機)나 양수기의 원리로 만든 장치로서 땅속 깊숙이 있는 고유를 퍼 올려서 채취하였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 된다. 

그리하여, 고대중국의 기록에서 만약 양수기나, 석유를 채취하는 기계에 대한 기록이 있다면, 이는 단군조선과 고대중국의 교류관계로 보아 필시 단군조선에도 이미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는 결론이 된다. 

땅의 표면이 다른 곳과 달라서 조사를 하여 보니 석유(石油:原油)였다면, 당연히 그 연유를 알아보았을 것이고, 그것에 전담연구자를 두어 석유를 채취하는 기계를 만들도록 하였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것인데, 즉 지금의 시추기계와 같은 장치를 제작하여 사용하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전혀 불가능하였던 것은 아니라 할 것이다. 

카. 광물채취 

서기전1652년에 금, 철, 고유(膏油)를 채취하였다. 물론 구리나 철을 채취하여 물건이나 무기를 만든 역사는 동철기(銅鐵期) 시대가 되는 서기전3897년에 건국된 배달나라 초기부터 등장한다. 제련술이 간단한 것부터 복잡한 것으로 발전한 것을 염두에 두면 금(金)을 이용한 역사는 배달나라 시대보다 훨씬 이전이 될 것인데, 마고성(麻姑城) 시대인 서기전10000년경 이전에 이미 오금(烏金)으로 귀걸이를 하고 다녔다는 기록이 있는 사실로도 알 수 있는 것이 된다. 

서기전2133년에 원공패전(圓孔貝錢)이라는 화폐를 주조하고, 서기전1680년에 자모전(子母錢)을 주조하고, 서기전1426년에 패엽전(貝葉錢)을 주조하고, 서기전643년에 방공전(方孔錢)을 주조하였다는 역사만 보더라도 단군조선 시대에 구리나 철을 채취하여 용품을 만드는 기술이 상당히 발달되어 있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게 된다. 

------------------------------- 
[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총재.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1. 홍익인간(弘益人間) 천부(天符)의 역사는 마고성(麻姑城:파미르고원)의 마고(麻姑)시대인 서기전70378년 계해년부터 시작되었음을 최초로 밝혔음. 
2. 역법(曆法)의 시초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585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3. 황궁씨를 이은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다는 것임을 밝혔음. 
4.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역(易), 음양오행(陰陽五行), 태양태음성력법(太陽太陰星曆法), 단군조선의 정치행정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배달나라 시대의 음양오행수리역(陰陽五行數理易)이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5.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혔으며,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으며,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에게 제(祭)를 올리는 권한을 가진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있었던 당요(唐堯)의 전란(戰亂)으로 인한 단군왕검(檀君王儉)의 동북 아사달로의 이주과정임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천자로 불리는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의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인 천자(天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우 치수기념 부루공덕 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여, 서기전2267년 이후 우(禹)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겨 남악(南嶽) 형산(衡山)에 세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추장(酋長)의 후손임을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최초 해독학자 허대동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 해독의 검증에 참여하여 첨수도(尖首刀),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상형 및 표음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
천산(天山)의 다른기사 보기  
ⓒ 데일리전북(http://www.dailyjeonbuk.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