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 263] 단군조선 문화제도 30
![]() | 2012년 03월 25일 (일) 18:21:31 | 천산(天山) ![]() | ![]() |
거. 천문지리(天文地理) 관측관찰
단군세기(檀君世紀)에 기록된 단군조선의 천문지리에 관한 관측관찰 기록은 극히 일부분으로서 대표적인 경우로 이해된다. 특히 일식(日蝕)이나 오성취루(五星聚婁) 현상은 주기적 천문현상으로서 연대기적 계산이 가능한 것으로 되는데, 다만, 음력(陰曆)으로 계산하여 그 기록의 정확성을 검증해야 하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서기전2183년에 일식(日蝕)이 있었다. 달에 의한 일식은 달이 해와 지구의 중간에 일직선으로 들어 달이 해를 가리는 현상이다. 즉, 일식은 지구가 자전축이 기울어진 상태에서 태양의 주위를 도는 공전(公轉)과 달이 지구의 주위를 도는 공전으로 인하여, 태양, 달, 지구의 순으로 일직선에 놓여지는 경우에 나타난다. 달이 태양을 완전히 가리는 경우를 개기일식(皆旣日蝕)이라 하는데 실제로는 약 8분 이내에 끝난다. 또, 달이 태양을 완전히 가리지 못하고 달의 둘레를 따라 태양의 가장자리가 보이는 일식은 금환일식(金環日蝕)이라 한다. 반면, 월식은 달이 지구에 의하여 가려질 때 일어나므로 보름에만 일어나는 것이 되는데 개기월식의 시간은 약 100분 정도 되며 전체 월식은 약 3.5시간에 이른다.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는 주기는 약 365일로서 공전속도는 초속 약 29.85킬로미터이며, 달이 지구를 공전하는 주기는 약 29.5일로 공전속도는 초속 약 947미터이고, 지구가 자전하는 주기는 약 24시간으로 자전속도는 초속 약 465미터이며, 달이 자전하는 주기는 공전주기와 같아 약 29.5일로 자전속도는 초속 약 8.56미터가 된다. 지구와 달의 공전 괘도를 고려하면 일식, 개기일식, 금환일식 등의 주기를 계산할 수 있을 것이다. 대략적으로 일식은 1년에 2~5차례 정도 일어나며, 월식은 일어날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으며, 1년에 보통 2차례로 1~3차례 발생한다.
서기전1985년에 두 개의 태양이 나란히 나왔다(兩日竝出). 실제로 태양이 두 개가 나타난 단순한 천문현상이라고 보기보다는, 최고의 왕(王)으로서 두 명이 출현한 정치적 상황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거나, 실제로 태양으로 보이는 혜성(彗星) 등이 출현하거나, 한 개의 태양이 개기일식으로 완전히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천문현상을 기록한 것일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서기전1733년에 오성취루(五星聚婁) 즉 오성(五星)이 루성(婁星)에 모였다. 오성은 수화목금토(水火木金土)의 오행성(五行星)을 가리키며, 루(婁)라는 별은 28수(宿) 중의 서방(西方)에 위치한 규(奎), 루(婁), 위(胃), 묘(昴), 필(畢), 자(觜), 삼(參)의 7개 별 중에서 루(婁)를 가리키는 것이 된다. 즉, 오성취루란 수화목금토의 오행성이 모두 루성 쪽으로 모여든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천문현상을 연대기적으로 계산하면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있을 것이며, 서기전1733년이라는 연대가 정확한지 아닌지 증명될 수 있을 것이다.
서기전1370년 가을에 하얀 태양이 무지개를 뚫었다(白日貫虹). 태양이 무지개 자리를 지나갔다는 것인데, 원래 무지개는 사람이 태양을 등진 채로 사람의 앞에 있는 공기 중의 수분이 태양광을 산란시켜 일어나는 현상이므로, 태양이 무지개를 그냥 둔 채 뚫고 지나가는 현상은 과학적으로 있을 수 없는 현상이 된다. 그래서 태양이 무지개를 뚫었다라는 말은, 무지개가 하늘을 가로질러 생겼다가 태양이 그 무지개의 중간자리를 지나갔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서기전1276년에 누런 안개(黃霧)가 끼었다. 누런 안개는 지금으로 말하면 황사(黃砂)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단군조선 땅으로 보면 서쪽으로 모래사막이 있는 내몽골지역과 내몽골의 서쪽으로 고비사막이 있는 바, 황사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은 충분히 있는 것이 된다.
서기전936년 여름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정확이 어느 지역에서 일어난 지진인지는 불명이나 진한(眞韓) 땅에 일어난 것으로 되는데, 지진의 진원지로 가능성이 높은 곳은 백두산 지역, 육지가 함몰하는 발해만 지역, 육지가 상승하는 동해안 지역이 될 것이나, 진한 지역에 속한 곳이라 보면 백두산 지역이나 백두산의 동쪽으로서 연해주의 동해안이 될 것이다.
서기전935년에 남해(南海)의 조수(潮水)가 3척이나 물러갔다. 여기서 남해는 진한(眞韓)의 남해이므로 지금의 요동반도 남쪽 바다가 되는데, 당시 바닷물이 3척 즉 약 1미터 정도 물러간 것이 되는 바, 단순한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썰물현상이 아니라 빙하의 증가 등 어떠한 기상이변으로 인한 것으로 보인다.
서기전786년에 두개의 해가 나란히 뜨더니(兩日竝出) 마침내 누런 안개(黃霧)가 사방에 그득하였다. 여기서 두 개의 해는 원래 있는 태양과 태양처럼 빛나는 혜성(彗星)이 나타난 것으로 보이며, 황사현상이 일어났던 것으로 될 것이다.
서기전248년 10월 초하루에 일식(日蝕)이 있었다. 단군조선 시대에 마지막으로 기록된 천문현상이 된다. 서기전2183년에 일어난 일식으로부터 1945년째에 일어난 일식이 되는데 그 사이에 수차례의 일식이 있었던 것이 될 것이다. 물론 일식은 낮 시간에 일어나는 것이므로 위도(緯度)와 경도(經度)에 따라 달리 나타나게 되어 다른 지역에서는 일식현상이 없을 수도 있는 것이 된다.
너. 편찬(編纂) 사업
단군조선 시대에는 책력, 역사, 지도를 편찬하거나 제작하였는데, 서기전2229년에는 구정도(丘井圖)와 칠회력(七回曆)을 만들어 배포(配布)하고, 서기전2180년에 배달류기(倍達留記)가 편찬되었으며, 서기전2096년에는 책력(冊曆)을 편찬하였고, 서기전1382년에는 주천력(周天曆)과 팔괘상중론(八卦相重論)이 지어졌으며, 서기전1341년에는 구한(九桓)지도가 제작되었다.
(1) 책력(冊曆)
서기전2229년에 배포된 칠회력(七回曆)은 계해(癸亥)를 머리로 하여 만든 칠회제신력(七回祭神曆)이라는 책력(冊曆)이며, 서기전2096년에 만들어진 책력은 갑자(甲子)를 머리로 한 역법(曆法)이 된다. 서기전1382년에 지어진 주천력(周天曆)도 역법이 되는데, 칠회력과 어떻게 다르고 같은지 불명인 바, 아마도 윷놀이판에 나타나는 역법(曆法)의 원리와 같이 28수(宿)를 배치시키거나 태호복희팔괘역의 원리를 반영하여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 및 달(月)과 오행성(五行星)의 운행(運行)을 부가하여 그림으로 그린 책력이 아닌가 추정되기도 한다.
(2 역사편찬(歷史編纂)
서기전2180년에 배달류기(倍達留記)가 편찬되었는 바, 단군조선 초기에 지어진 것으로서 그 기록의 대상이 되는 역사는 단군조선 초기보다는 그 이전이 되는 배달나라 시대가 될 것이다.
배달류기라는 용어가 과연 역사적으로 정확한 명칭인지는 불명인데. 배달(倍達)이라는 명칭과 단(檀)이라는 명칭 또는 박달(朴達) 및 백달(白達)이라는 명칭 중에서 어느 명칭이 역사상 가장 먼저 출현한 것인지가 문제된다. 물론 배달(倍達)이라는 말은 백달(白達)이라는 글자를 읽는 소리에서 변음된 것으로 보이는 바, 단(檀)이라는 글자가 가장 먼저 출현한 것이라면 배달류기의 배달(倍達)은 단(檀)의 대체자(代替字)가 될 것이다.
(3) 지도제작
단군조선 시대에 정전법(井田法) 실행을 위하여 구정도(丘井圖)가 제작된 것이 되며, 단군조선의 전 영역으로 확대실시하기 위하여 이에 따라 구한(九桓)지도와 구정도가 필요한 것이 되는데, 구한지도에는 단군조선의 삼한관경과 삼한관경 외의 구족을 모두 포함하는 지역이 들어가는 것이 된다.
더. 금석문(金石文)
단군조선 시대에는 이미 문자가 사용되고 있었는 바, 금판이나 돌, 청동 등에 글자를 새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1) 삼일신고 청석본
서기전2333년경에 단군왕검 천제(天帝)께서 무리들에게 삼일신고(三一神誥)를 강연하실 때, 당시 문자담당이던 신지씨(神誌氏)가 동해(東海)에서 고시씨(高矢氏)가 캐어 온 청석(靑石)에다 삼일신고를 새겼던 것인 바, 이를 삼일신고 청석본(靑石本) 또는 석본(石本)이라 한다. 또, 서기전1122년 은(殷)나라가 망할 때 은왕족 기자가 주나라의 신하가 되지 아니하고 서기전1120년에 단군조선으로 망명하였는 바, 이때 기자는 사사(士師)이던 왕수긍(王受兢)에게 부탁하여 삼일신고를 단목판(檀木板)에 새기게 하여 읽었는데, 이를 삼일신고 단목본(檀木本) 또는 단본(檀本)이라 한다.
(2) 금간옥첩(金簡玉牒)
소위 금간옥첩이란 불리는 책은 서기전2267년에 단군조선의 사자이던 태자부루(太子扶婁)께서 주관한 도산회의(塗山會議)에서 우순(虞舜)의 신하 사공(司空) 우(禹)에게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을 전수할 때 건네 준 것인데, 글자대로 풀이하여 보면 금판과 옥판에 글자를 새겨 놓은 것이 된다.
단군조선 시대에는 배달나라 시대부터 내려온 상형문자(象形文字)가 있었으며, 서기전2181년에는 소리글자인 가림토(加臨土) 38자가 정선되었는데, 서기전2267년의 도산회의 때에는 가림토 38자가 정립되기 이전이므로, 소위 금간옥첩에 새겨진 글자는 가림토 38자가 아닌 상형문자임이 틀림없는 것이 된다. 그 새겨진 글자가 어떤 형태였는지는 불명이나, 배달나라 시대에 있었던 서체(書體)로는 녹서(鹿書), 용서(龍書), 화서(花書), 우서(雨書), 과두문(蝌蚪文), 조족문(鳥足文) 등이 있었으니 이들 서체 중의 하나일 것이다.
(3) 치수기념비(治水記念碑)
치수에는 치산이 뒤 따르는 바, 치산치수에는 자(尺), 직각자(曲尺:矩) 또는 원을 그리는 자(規) 등이 사용되었다.
서기전2284년에 단군조선의 우수주(牛首州)에 대홍수가 일어나 풍백(風伯) 팽우(彭虞)가 치수를 잘 하여 백성들에게 피해가 없었으며, 이에 우수주에 치수기념비를 세웠다. 우수주는 속말(粟末)이라는 강이 있는 지역으로서 지금의 송화강(松花江)과 우수리(牛首里)강 지역이 될 것이다.
송화강과 우수리가 곧 속말 즉 소머리(牛首)로서 소므르, 소물(牛水)이 되며, 송화강은 우수리강과 함께 흑룡강(아무르강)에 합류하는 강이 된다. 여기서 흑룡강의 흑룡(黑龍)이 곧 아무르이며, 아무르는 흐므르(검므르)에서 변음된 것으로 보인다.
또, 서기전2267년에 개최된 도산회의에서 태자부루로부터 치수에 관한 전권(專權)을 부여받은 사공(司空) 우(禹)가 결국 치수에 성공하게 되었는데, 이에 우(禹)는 양자강(楊子江) 남쪽에 있는 남악(南嶽) 형산(衡山)에 치수기념비를 세웠는 바, 이 치수기념비는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긴 비(碑)이기고 하며, 그 새겨진 글자의 형태가 과두문(蝌蚪文)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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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禹) 치수기념(治水記念) 부루공덕(扶婁功德) 비(碑)> | ||
우(禹)가 세운 치수기념비의 비문을 명(明)나라 때 양신(楊愼)이라는 학자가 해독(解讀)하였는데 그 글을 해석(解釋)하면 아래와 같다.
“임금께서 여러 좌우의 대신들에게 말씀한 바대로, 물이 차 섬이 되어버린 모든 곳을 돌아다니고, 새와 짐승들이 드나드는 곳에 오르기도 하였도다! 온몸으로 직접 홍수를 체험하면서 밝게 펴 일으켰도다! 오랫동안 돌아다니며 집을 잊었고, 악록산을 뜰 삼아 잠을 자기도 하였도다! 슬기롭게 수행하며 만들기도 하고 부수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마음은 심히 새롭게 되지 못하였도다! 마음의 평정을 구하기 위하여 화악태형(華岳泰衡)으로 갔으나, 산마루는 트였으되 일은 이루어지지 않고 쇠퇴하였도다! 신(神)에게 제사 올리기에 힘쓰니, 막힌것과 어두움이 사라지고, 남독의 범람이 걷혀지고, 옷가지가 갖추어지고 먹을 것이 마련되었도다! 온 나라가 평안하고, 백성들이 춤추는 시대여 영원하여라!
(楊愼禹碑釋文 : 承帝日咨,翼輔佐卿。洲諸與登,鳥獸之門。參身洪流,而明發爾興。久旅忘家,宿嶽麓庭。智營形折,心罔弗辰。往求平定,華岳泰衡。宗疏事衰,勞余神禋。鬱塞昏徙。南瀆愆亨。衣制食備,萬國其寧,竄舞永奔。)”
(4) 삼일신고비(三一神誥碑)
서기전2225년에 마한(馬韓) 불여래(弗如來)가 남산(南山)에 삼일신고비를 세웠다. 여기서 남산은 단군조선 시대의 마한 땅의 수도였던 백아강(白牙岡)의 남산이므로 지금의 평양(平壤) 지역에 있는 남산이 된다.
삼일신고(三一神誥)는 삼일신(三一神) 즉 삼신(三神)이자 일신(一神:天神)의 가르침으로서 모두 366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무한(無限) 창조적(創造的) 진화(進化)의 순환역(循環易)을 가르치고 있는 천부경(天符經)을 철학적(哲學的)으로, 신교적(神敎的)으로, 도학적(道學的)으로 연역(演繹)하여 가르침을 주는 것이 된다.
(5) 조야별기(朝野別記) 석비(石碑)
서기전2133년 10월에 조정(朝廷)과 백성(百姓)의 구별을 돌에 새겨 써서 백성들에게 널리 알렸다.
나라를 다스리는 중앙조정과 생업에 종사하며 다스림을 받고 나라로부터 보호를 받는 일반 백성들의 할 일이 각각 있는 바, 조정(朝廷)으로서의 할 일과 백성으로서의 할 일을 구별하여 널리 알려서 그 맡은 직분(職分)을 다하도록 한 것이 된다.
(6)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
서기전1833년 8월에 요하(遼河)의 왼쪽에 순수관경비를 세웠다.
여기서 요하는 단군조선 시대의 소위 요수(遼水)로서 최소한 요하의 동쪽은 번한(番韓) 땅이 되는데, 서기250년경까지 지금의 북경(北京)을 끼고 흐르는 영정하(永定河)가 대요수(大遼水)였는 바, 이 영정하가 된다. 그리하여 여기 순수관경비는 지금의 영정하 동쪽으로 번한 땅의 서쪽에 세워진 것이 되는 것이다.
한편,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이 되는 고죽국(孤竹國)은 서기전2267년경에 지금의 북경과 천진을 중심으로 하여 봉해진 나라가 되는데, 만약 천왕이 고죽국의 땅에 순수관경비를 세웠던 것이라면 고죽국의 서쪽 경계가 요수가 되는 강이 있었던 것이 되는데, 지금의 천진 부근을 흐르는 탁수(涿水)가 당시의 요수(遼水)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 된다.
즉, 서기전2301년에 요수(遼水)는 지금의 영정하가 되고, 서기전2267년 이후에는 요수가 지금의 탁수(涿水)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한편, 고죽국의 수도는 무체성(無棣城)이라고 하는 바, 제(齊)나라 땅이던 곳에 갈석산(碣石山)이 있고 무체라는 지명이 있어 고죽국의 영역이 지금의 산동지역에까지 걸쳤던 것으로도 보인다. 그래서 후대에 나타나는 래이(萊夷), 즉묵(卽墨), 절묵(節墨)의 땅이 고죽국 땅이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 된다.
순수관경비는 임금이 순행(巡行)하여 사냥을 하면서 영역(領域)을 관리하는 차원에서 세운 비를 가리킨다.
(7) 열성군한(列聖群汗) 공적비(功績碑)
서기전1634년에 태백산에 비석을 세워 열성(列聖:천왕)과 군한(群汗:군후)들의 공적을 새겼다. 여기서 태백산은 단군조선 삼한관경의 중앙이 되는 지금의 백두산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열성은 역대 단군 천왕(天王)을 가리키는 것이 되고, 군한(群汗)은 군(君)과 제후(諸侯)를 가리키는 것이 된다.
서기전909년에 청구(靑邱)에 치우천왕(蚩尤天王)의 공덕(功德)을 돌에 새겼다. 여기서 청구는 지금의 산동지역으로서 배달나라 제14대 치우천왕이 수도를 두었던 곳이며, 단군왕검 천제(天帝)께서 서기전2333년경에 고시씨(高矢氏)의 후예를 군(君)으로 봉한 나라인데, 주나라 춘추시대의 140년 이전까지 청구라는 나라가 존속하고 있었던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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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방정) 등> | ||
(8) 기후방정(箕侯方鼎)과 고죽방정(孤竹方鼎)
난하(灤河) 동쪽의 발해만 유역에서 출토된 기후방정과 고죽방정으로 인하여 기후국(箕侯國)과 고죽국(孤竹國)이 난하유역에서 그 동쪽 지역에 걸쳐 있었던 것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있는데, 기후국은 태항산 서쪽 너머에 있었고, 고죽국은 기후국의 동쪽으로 발해만 서편을 끼고서 산동반도 북쪽 지역까지 걸쳐 있었던 나라가 된다.
일반 솥은 다리가 셋이 달린 원형(圓形)이나, 방정(方鼎)은 네모 모양의 솥이 된다. 기후방정과 고죽방정은 청동제품으로서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처럼 주조물(鑄造物)에 새겨 넣은 글자를 소위 금문(金文)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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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죽방정(孤竹方鼎)의 금문(金文)> | ||
고죽국은 서기전2267년경부터, 기후국은 서기전1120년부터 단군조선의 군후국이었는 바, 이후에 주조된 소위 고죽방정과 기후방정은 단군조선의 유물이 되는 것이며, 이들에 새겨진 글자들은 소위 금문으로서 은(殷)나라나 주(周)나라의 글자가 아니라 단군조선의 글자가 되는 것이다. 설사 단군조선의 글자와 은주(殷周)의 글자가 같다 할지라도 그 글자가 은나라나 주나라만의 글자가 아닌 것이 된다.
즉, 은나라 문자로 알려진 소위 갑골문이 단군조선의 영역에서 나타난다면 이는 은나라 갑골문이 아니라 단군조선의 갑골문이 되는 것이며, 은나라 말기나 주나라 초기에 만들어졌다고 알려지는 청동제품에 새겨진 글자가 단군조선의 영역에서 출토된 청동제품에 새겨진 글자와 같다 할지라도, 이들 문자가 은나라나 주나라만의 글자가 아니라 곧 단군조선의 글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단군조선 시대에는 배달나라 때부터 사용되어 오던 상형문자(象形文字)와, 소위 상형문자 자체가 소리글자가 되는 소위 상음문자(象音文字), 그리고 소위 가림토(加臨土)가 되는 소리글자(表音文字)가 함께 사용되고 있었던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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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총재.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동안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1. 홍익인간(弘益人間) 천부(天符)의 역사는 마고성(麻姑城:파미르고원)의 마고(麻姑)시대인 서기전70378년 계해년(癸亥年)부터 시작되었음을 최초로 밝혔음.
2. 역법(曆法)이 시작된 해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585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3. 황궁씨를 이은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다는 것임을 밝혔음.
4.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무한조화순환역(無限造化循環易), 음양오행(陰陽五行), 태양태음성력(太陽太陰星曆), 단군조선의 정치행정 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배달나라 시대의 음양오행수리역(陰陽五行數理易)이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5.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히고,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으며,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에게 제(祭)를 올리는 권한을 가진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있었던 당요(唐堯)의 전란(戰亂)으로 인한 단군왕검(檀君王儉)의 동북 아사달로의 이동과정임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천자로 불리는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의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인 천자(天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우 치수기념 부루공덕 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여, 서기전2267년 이후 우(禹)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겨 남악(南嶽) 형산(衡山)에 세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추장(酋長)의 후손임을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최초 해독학자 허대동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 해독의 검증에 참여하여 첨수도(尖首刀),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상형 및 표음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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