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 268] 단군조선 문화제도 35
(3) 진서(眞書)의 변형체(變形體)인 부예(符隸)
(가) 부예(符隸)
부예라는 글자는 서기전925년에 단군조선(檀君朝鮮) 부여(夫餘)의 한수(漢水) 사람 왕문(王文)이 이두법(吏讀法)을 만들 때 신전(神篆)을 간략화 하여 만들었다라고 기록되고 있다.
원래 부여(夫餘)는 단군조선 초기에 단군왕검 천제의 넷째 아들인 부여(扶餘)가 봉해진 군국(君國)인데, 서기전1285년부터 부여 땅이 단군조선의 중심인 수도가 있던 곳이 되어 부여가 단군조선의 대칭(代稱)이 되기도 한다.
한수(漢水)는 왕문(王文)의 고향이 되는 일토산(一土山) 지역에 있던 강이 되는데, 일토산은 왕문의 선조가 되는 서기전1122년경 인물로서 망명자인 은(殷) 왕족 기자(箕子)의 사사(士師)이던 왕수긍(王受兢)의 고향이기도 한 바, 왕문은 번조선 사람이 되므로 일토산과 한수는 곧 번조선에 있었던 것이 된다.
번조선의 관할지역을 고려하면, 번조선은 지금의 발해만 유역을 중심으로 하여 지금의 요동반도의 요하(遼河) 서편으로 산동지역까지 포함하는 땅이 되는데, 이리하여 일토산(一土山)과 한수(漢水)는 서기전1120년경에 기자(箕子)가 자리잡은 기후국(箕侯國)에 있거나 지금의 요하 서편에 있는 지역이 될 것이다.
진(秦)나라 때 정막(程邈)이 숙신(肅愼)으로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한수(漢水)에서 왕문의 예법(隸法)을 얻었으며, 그 획을 계승하여 조금 바꾸어 팔분체(八分體)를 만들었다 한다. 숙신은 부여의 동쪽에 위치한 땅으로 지금의 송화강 동쪽에 위치한 것이 된다.
숙신(肅愼)은 원래 서기전2333년경에 송화강 동쪽에 봉해진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서 뒤에 읍루(挹婁), 말갈(靺鞨) 등으로 불리우고 여진(女眞), 만주(滿洲)로 불리기도 한다. 진(秦)나라는 주(周)나라를 멸망시킨 서기전249년부터 망한 서기전207년까지 사이에 존재한 나라인데, 단군조선은 서기전 238년에 망하고 서기전 232년에 해모수의 북부여에 접수되었으므로, 진(秦)나라 출신의 정막이 활동한 시기는 단군조선 말기에서 북부여 해모수(서기전 239-서기전 194) 시대에 해당하는 것이 된다.
진서(眞書)는 단군조선 초기부터 존재한 상형문자인 신전(神篆)을 가리킨다. 이에 반하여 서기전925년에 왕문(王文)이 만든 부예(符隸)는 신전(神篆)을 변형시켜 간소화한 글자가 된다. 즉 진서(眞書)가 단군조선의 전서체(篆書體)라면 부예(符隸)는 전서체를 변형시킨 예서체(隸書體)에 해당하는 것이다.
부예의 부(符)는 상형문자임을 나타내고 있으며, 예(隸)는 이전의 문자를 따른 글자임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그리하여 부예는 완전히 새로운 글자라는 것이 아니라 신전(神篆)에서 나온 후신(後身)임을 뜻하는 것이다.
부예가 어떤 형태의 글자인지는 아직 명문(明文)의 기록이 없어 불명이나, 역사적으로 추론하면 소위 춘추시대부터 존재한 것이 되는 소위 첨수도(尖首刀)와 명도전(明刀錢)에 새겨진 문자의 형태가 될 것이다.
첨수도와 명도전에는 수많은 상형문자와 가림토문자 및 이에 유사한 모양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특히 상형문자에 해당하는 글자들이 곧 왕문이 만들었다라는 부예(符隸)와 상통하는 문자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첨수도나 명도전에는 그 문자들이 상형을 딴 경우가 많은데, 그 글자들의 모습이 복잡한 형태의 글자가 아니라 어떻게 보면 소리글자의 자음과 모음으로 구분이 가능한 간단한 형태의 상형문자이기 때문이다.
즉, 부예(符隸)를 간략하게 말한다면, 복잡한 상형문자를 간략화(簡略化)하여 소리글자인 자음과 모음의 조합으로 읽을 수 있는 형태까지 변형된 글자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부예가 후대에 진(秦)나라의 정막(程邈)에 의하여 지금의 한자(漢字)의 원류가 되는 글자 즉 소위 예서체(隸書體)에 해당하는 글자의 모습으로 변형된 것으로 된다.
(나) 왕문(王文)과 왕수긍(王受兢)
왕문은 단군조선의 번조선(番朝鮮) 사람으로서 서기전925년에 단군조선의 상형문자인 신전(神篆:眞書)을 간략화하여 한자(漢字)의 원류가 되는 문자인 부예(符隸)를 만들고, 이두문(吏讀文)을 만들었다.
왕문의 선조인 왕수긍(王受兢)이라는 인물은 서기전1120년경 은나라 왕족인 기자(箕子)가 은나라가 망하자 주나라 무왕(武王)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하고 단군조선으로 도망하여 왔을 때, 기자의 사사(士師)였는데, 이때 기자는 단군조선의 삼일신고(三一神誥)를 왕수긍에게 부탁하여 은문(殷文)으로 적게 하여 즐겨 읽었다고 전한다.
왕문은 당시 주(周)나라 사람이 아니다. 당시 왕문의 고향이 되는 한수(漢水)는 양자강의 지류가 되는 지금의 한수(漢水)가 아니라, 황하(黃河) 이북으로 단군조선 영역 내에 있던 번조선(番朝鮮) 땅에 소재한 강이 되는 것이다.
왕수긍(王受兢)은 일토산(一土山) 사람이라 하는 바, 서기전1120년경 당시 일토산은 곧 왕산(王山)이 되고, 후대에 일토산을 일명 평양(平壤)이라고도 하는데, 이 평양은 지금의 대동강 평양이 아니라, 서기전425년경에는 평양이 해성(海城)으로서 지금의 요동반도 북부에 소재하는 지금의 심양(瀋陽) 남쪽에 위치하는 안산(按山) 지역이 되며, 심양은 단군조선의 장당경(藏唐京)이 소재한 곳이고, 이 장당경은 개사원(蓋斯原)에 있었던 것이다.
장당경은 서기전1285년 단군 색불루(索弗婁)가 즉위하면서 고등왕묘(高登王廟)를 건립한 곳이며, 부여(夫餘) 땅에 속한다. 즉 서기전425년 단군 구물(丘勿)이 소도를 장당경으로 삼고 국호를 대부여(大夫餘)라 하였다. 즉 왕수긍, 왕문의 집안은 이곳 해성(海城) 근처인 부여지역 출신으로 추정되는데, 이 해성(海城) 지역은 번한(番韓) 또는 번조선(番朝鮮), 후대의 기씨(箕氏)의 번조선, 위씨조선(衛氏朝鮮)과 근접한 곳이기도 하다.
다만, 서기전1120년경에 일토산(一土山)이 어디인지, 서기전925년경에 한수(漢水) 또는 서기전250년경의 부여 땅의 한수(漢水)가 어디인지 불명인데, 일토산(一土山)과 한수(漢水)는 번조선 땅이던 요동반도 서쪽으로 태원(太原) 이북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한편, 문화류씨(文化柳氏) 족보에는 왕문이 쓴 글은 전자 같기도 하고 부적 같기도 한데, 왕문은 왕수긍(箕子의 師士)의 아버지다(王文書文字而 如篆 如符文 卽 受兢之父)라고 하여, 왕문(王文)이 왕수긍(王受兢)의 선대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명백한 오류이며, 왕문이 왕수긍보다 약200년 이후의 후손으로 약7세손(世孫) 뻘이 된다.
왕문이 만든 이두법(吏讀法)은 서기전925년 당시에 쓰이던 상형문자로써 그 훈(訓)이나 음(音)을 따서 우리말을 표기한 방법이 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보더라도 신라(新羅)가 아닌 고구려(高句麗)에서도 이미 이두식(吏讀式) 표기가 쓰여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신라의 설총이 처음으로 이두를 만든 것은 아니며, 설총은 신라의 이두법을 체계화하여 정리한 인물이 되는 것이다. 즉, 우리에게 이두법(吏讀法)은 서기전925년부터 시작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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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총재.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동안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1. 홍익인간(弘益人間) 천부(天符)의 역사는 마고성(麻姑城:파미르고원)의 마고(麻姑)시대인 서기전70378년 계해년(癸亥年)부터 시작되었음을 최초로 밝혔음.
2. 역법(曆法)이 시작된 해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585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3. 황궁씨를 이은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다는 것임을 밝혔음.
4.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무한조화순환역(無限造化循環易), 음양오행(陰陽五行), 태양태음성력(太陽太陰星曆), 단군조선의 정치행정 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배달나라 시대의 음양오행수리역(陰陽五行數理易)이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5.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히고,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으며,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에게 제(祭)를 올리는 권한을 가진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있었던 당요(唐堯)의 전란(戰亂)으로 인한 단군왕검(檀君王儉)의 동북 아사달로의 이동과정임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천자로 불리는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의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인 천자(天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우 치수기념 부루공덕 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여, 서기전2267년 이후 우(禹)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겨 남악(南嶽) 형산(衡山)에 세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추장(酋長)의 후손임을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최초 해독학자 허대동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 해독의 검증에 참여하여 첨수도(尖首刀),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상형 및 표음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
2012년 03월 30일 (금) 07:25:15 | 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
(가) 부예(符隸)
부예라는 글자는 서기전925년에 단군조선(檀君朝鮮) 부여(夫餘)의 한수(漢水) 사람 왕문(王文)이 이두법(吏讀法)을 만들 때 신전(神篆)을 간략화 하여 만들었다라고 기록되고 있다.
원래 부여(夫餘)는 단군조선 초기에 단군왕검 천제의 넷째 아들인 부여(扶餘)가 봉해진 군국(君國)인데, 서기전1285년부터 부여 땅이 단군조선의 중심인 수도가 있던 곳이 되어 부여가 단군조선의 대칭(代稱)이 되기도 한다.
한수(漢水)는 왕문(王文)의 고향이 되는 일토산(一土山) 지역에 있던 강이 되는데, 일토산은 왕문의 선조가 되는 서기전1122년경 인물로서 망명자인 은(殷) 왕족 기자(箕子)의 사사(士師)이던 왕수긍(王受兢)의 고향이기도 한 바, 왕문은 번조선 사람이 되므로 일토산과 한수는 곧 번조선에 있었던 것이 된다.
번조선의 관할지역을 고려하면, 번조선은 지금의 발해만 유역을 중심으로 하여 지금의 요동반도의 요하(遼河) 서편으로 산동지역까지 포함하는 땅이 되는데, 이리하여 일토산(一土山)과 한수(漢水)는 서기전1120년경에 기자(箕子)가 자리잡은 기후국(箕侯國)에 있거나 지금의 요하 서편에 있는 지역이 될 것이다.
진(秦)나라 때 정막(程邈)이 숙신(肅愼)으로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한수(漢水)에서 왕문의 예법(隸法)을 얻었으며, 그 획을 계승하여 조금 바꾸어 팔분체(八分體)를 만들었다 한다. 숙신은 부여의 동쪽에 위치한 땅으로 지금의 송화강 동쪽에 위치한 것이 된다.
숙신(肅愼)은 원래 서기전2333년경에 송화강 동쪽에 봉해진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서 뒤에 읍루(挹婁), 말갈(靺鞨) 등으로 불리우고 여진(女眞), 만주(滿洲)로 불리기도 한다. 진(秦)나라는 주(周)나라를 멸망시킨 서기전249년부터 망한 서기전207년까지 사이에 존재한 나라인데, 단군조선은 서기전 238년에 망하고 서기전 232년에 해모수의 북부여에 접수되었으므로, 진(秦)나라 출신의 정막이 활동한 시기는 단군조선 말기에서 북부여 해모수(서기전 239-서기전 194) 시대에 해당하는 것이 된다.
진서(眞書)는 단군조선 초기부터 존재한 상형문자인 신전(神篆)을 가리킨다. 이에 반하여 서기전925년에 왕문(王文)이 만든 부예(符隸)는 신전(神篆)을 변형시켜 간소화한 글자가 된다. 즉 진서(眞書)가 단군조선의 전서체(篆書體)라면 부예(符隸)는 전서체를 변형시킨 예서체(隸書體)에 해당하는 것이다.
부예의 부(符)는 상형문자임을 나타내고 있으며, 예(隸)는 이전의 문자를 따른 글자임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그리하여 부예는 완전히 새로운 글자라는 것이 아니라 신전(神篆)에서 나온 후신(後身)임을 뜻하는 것이다.
부예가 어떤 형태의 글자인지는 아직 명문(明文)의 기록이 없어 불명이나, 역사적으로 추론하면 소위 춘추시대부터 존재한 것이 되는 소위 첨수도(尖首刀)와 명도전(明刀錢)에 새겨진 문자의 형태가 될 것이다.
첨수도와 명도전에는 수많은 상형문자와 가림토문자 및 이에 유사한 모양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특히 상형문자에 해당하는 글자들이 곧 왕문이 만들었다라는 부예(符隸)와 상통하는 문자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첨수도나 명도전에는 그 문자들이 상형을 딴 경우가 많은데, 그 글자들의 모습이 복잡한 형태의 글자가 아니라 어떻게 보면 소리글자의 자음과 모음으로 구분이 가능한 간단한 형태의 상형문자이기 때문이다.
<명도전에 새겨진 문자 예:가림토> | ||
즉, 부예(符隸)를 간략하게 말한다면, 복잡한 상형문자를 간략화(簡略化)하여 소리글자인 자음과 모음의 조합으로 읽을 수 있는 형태까지 변형된 글자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부예가 후대에 진(秦)나라의 정막(程邈)에 의하여 지금의 한자(漢字)의 원류가 되는 글자 즉 소위 예서체(隸書體)에 해당하는 글자의 모습으로 변형된 것으로 된다.
(나) 왕문(王文)과 왕수긍(王受兢)
왕문은 단군조선의 번조선(番朝鮮) 사람으로서 서기전925년에 단군조선의 상형문자인 신전(神篆:眞書)을 간략화하여 한자(漢字)의 원류가 되는 문자인 부예(符隸)를 만들고, 이두문(吏讀文)을 만들었다.
왕문의 선조인 왕수긍(王受兢)이라는 인물은 서기전1120년경 은나라 왕족인 기자(箕子)가 은나라가 망하자 주나라 무왕(武王)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하고 단군조선으로 도망하여 왔을 때, 기자의 사사(士師)였는데, 이때 기자는 단군조선의 삼일신고(三一神誥)를 왕수긍에게 부탁하여 은문(殷文)으로 적게 하여 즐겨 읽었다고 전한다.
왕문은 당시 주(周)나라 사람이 아니다. 당시 왕문의 고향이 되는 한수(漢水)는 양자강의 지류가 되는 지금의 한수(漢水)가 아니라, 황하(黃河) 이북으로 단군조선 영역 내에 있던 번조선(番朝鮮) 땅에 소재한 강이 되는 것이다.
왕수긍(王受兢)은 일토산(一土山) 사람이라 하는 바, 서기전1120년경 당시 일토산은 곧 왕산(王山)이 되고, 후대에 일토산을 일명 평양(平壤)이라고도 하는데, 이 평양은 지금의 대동강 평양이 아니라, 서기전425년경에는 평양이 해성(海城)으로서 지금의 요동반도 북부에 소재하는 지금의 심양(瀋陽) 남쪽에 위치하는 안산(按山) 지역이 되며, 심양은 단군조선의 장당경(藏唐京)이 소재한 곳이고, 이 장당경은 개사원(蓋斯原)에 있었던 것이다.
장당경은 서기전1285년 단군 색불루(索弗婁)가 즉위하면서 고등왕묘(高登王廟)를 건립한 곳이며, 부여(夫餘) 땅에 속한다. 즉 서기전425년 단군 구물(丘勿)이 소도를 장당경으로 삼고 국호를 대부여(大夫餘)라 하였다. 즉 왕수긍, 왕문의 집안은 이곳 해성(海城) 근처인 부여지역 출신으로 추정되는데, 이 해성(海城) 지역은 번한(番韓) 또는 번조선(番朝鮮), 후대의 기씨(箕氏)의 번조선, 위씨조선(衛氏朝鮮)과 근접한 곳이기도 하다.
다만, 서기전1120년경에 일토산(一土山)이 어디인지, 서기전925년경에 한수(漢水) 또는 서기전250년경의 부여 땅의 한수(漢水)가 어디인지 불명인데, 일토산(一土山)과 한수(漢水)는 번조선 땅이던 요동반도 서쪽으로 태원(太原) 이북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한편, 문화류씨(文化柳氏) 족보에는 왕문이 쓴 글은 전자 같기도 하고 부적 같기도 한데, 왕문은 왕수긍(箕子의 師士)의 아버지다(王文書文字而 如篆 如符文 卽 受兢之父)라고 하여, 왕문(王文)이 왕수긍(王受兢)의 선대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명백한 오류이며, 왕문이 왕수긍보다 약200년 이후의 후손으로 약7세손(世孫) 뻘이 된다.
왕문이 만든 이두법(吏讀法)은 서기전925년 당시에 쓰이던 상형문자로써 그 훈(訓)이나 음(音)을 따서 우리말을 표기한 방법이 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보더라도 신라(新羅)가 아닌 고구려(高句麗)에서도 이미 이두식(吏讀式) 표기가 쓰여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신라의 설총이 처음으로 이두를 만든 것은 아니며, 설총은 신라의 이두법을 체계화하여 정리한 인물이 되는 것이다. 즉, 우리에게 이두법(吏讀法)은 서기전925년부터 시작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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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총재.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1. 홍익인간(弘益人間) 천부(天符)의 역사는 마고성(麻姑城:파미르고원)의 마고(麻姑)시대인 서기전70378년 계해년(癸亥年)부터 시작되었음을 최초로 밝혔음.
2. 역법(曆法)이 시작된 해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585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3. 황궁씨를 이은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다는 것임을 밝혔음.
4.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무한조화순환역(無限造化循環易), 음양오행(陰陽五行), 태양태음성력(太陽太陰星曆), 단군조선의 정치행정 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배달나라 시대의 음양오행수리역(陰陽五行數理易)이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5.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히고,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으며,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에게 제(祭)를 올리는 권한을 가진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있었던 당요(唐堯)의 전란(戰亂)으로 인한 단군왕검(檀君王儉)의 동북 아사달로의 이동과정임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천자로 불리는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의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인 천자(天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우 치수기념 부루공덕 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여, 서기전2267년 이후 우(禹)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겨 남악(南嶽) 형산(衡山)에 세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추장(酋長)의 후손임을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최초 해독학자 허대동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 해독의 검증에 참여하여 첨수도(尖首刀),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상형 및 표음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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