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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 290] 한사군(漢四郡)의 문제 3

양해천 2018. 1. 22. 13:05
[홍익인간 290] 한사군(漢四郡)의 문제 3
2012년 04월 21일 (토) 09:04:49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원래 조선 땅인 요동군과 요동속국 문제] 

1. 요동군(遼東郡) 

요동군은 진(秦)나라 때 설치하여 유주(幽州)에 예속시켰다 하는 바, 원래 단군조선의 땅이 된다. 즉, 원래 단군조선의 땅이던 것을 진나라 이전의 주나라 전국시대에 연(燕)나라가 점차 동진하여 확보한 땅을 진나라가 이어받거나 별도로 설치한 것이 된다. 

이 요동군은 서기전281년경에 연나라 진개가 번조선과 경계를 삼았던 만번한(滿番汗)의 서쪽으로서 당시 대요수(大遼水)이던 지금의 영정하(永定河)의 동쪽 지역이 된다. 만번한은 패수(浿水)이던 지금의 난하(灤河) 서쪽으로 지금의 고하(沽河) 사이에 위치하는 것이 된다. 

가. 한서 지리지의 기록 

(1) 양평(襄平) 

신(新)나라의 왕망(王莽)은 창평(昌平)이라고 했다. 

(2) 신창(新昌) 

(3) 무려(無慮) 

의무려(醫無閭)라고도 한다. 

(4) 망평(望平) 

대요수(大遼水)가 요동군 망평현이라는 새방의 밖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안시(安市)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갔다. 

망평이 요동군에 속하므로 대요수의 동쪽에 위치한 것이 되며, 대요수인 영정하가 남류하는 지역에 안시(安市)가 있는 것이 된다. 한편, 후대에 고구려의 안시성(安市城)이 되는 곳은 패수이던 지금의 난하 중하류에 위치한 단군조선의 탕지성(湯池城)이 있던 안촌홀(安村忽)로서, 여기 요동군 안시현의 안시(安市)와는 다른 곳이 된다. 

(5) 방(房) 

후한(後漢)시대에는 요동군에서 폐지되어 요동속국으로 편입된 것으로 된다. 

(6) 후성(候城) 

중부도위가 다스렸다. 

(7) 요대(遼隊) 

요대를 요수(遼遂)라고도 한 것이 되는데, 대(隊)는 수(遂)의 오기일 수 있는 것이 된다. 왕망(王莽)은 요대를 순목(順睦)이라 하였다. 

후한시대에는 요동군에서 제외된 것으로 된다. 

(8) 요양(遼陽) 

대량수(大梁水)가 서남쪽으로부터 동북쪽으로 흘러 요양(遼陽)에 이르러 요수(遼水)로 들어가는데, 왕망은 이를 요음(遼陰)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대량수는 대요수(大遼水)인 지금의 영정하(永定河)에 합류하는 강이 되며, 요양(遼陽)이라는 말은 요수(遼水)의 남쪽이라는 것이 되고, 요음(遼陰)은 요수의 북쪽이라는 것이 된다. 

즉, 요양(遼陽)이라는 땅은 대량수(大梁水)라는 강이 서남쪽에서 동북쪽으로 흘러 대요수에 합류하는 지역에 있으며,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는 요수의 흐름으로 보아 요수의 남쪽 또는 동쪽에 위치하였던 것이 된다. 

요양은 요의 남쪽 또는 주나라 역(易)의 방위해석으로 보면 동쪽이라는 뜻을 가지는 글자인 바, 결국 소요수(小遼水)의 남쪽과, 대량수(大梁水)가 그 지류가 되는 대요수(大遼水)의 동쪽에 위치한 것이 된다. 

후한시대에는 요동군에서 제외시키고 현도군에 편입된 것으로 된다. 단군조선 시대에는 구려국에 속하는 땅으로서 고죽국의 북쪽이자 번한의 서북쪽에 위치한 것이 된다. 

(9) 검독(儉瀆) 

위만조선의 수도라고 하나, 위만의 수도인 험독은 패수인 난하의 동쪽에 있어 요동군에 속할 수 없는 땅인 바, 이 검독은 요동군이 되는 곳에 있는 땅으로서 위만조선의 수도인 험독과는 다른 곳에 있는 지명이 된다. 

즉, 서기전221년경 진(秦)나라 때 요동군에 검독현이 소속되었다는 것인 바, 이 시기 이후까지 번조선과 위만조선은 건재하였던 것이므로, 패수가 되는 지금의 난하 서쪽으로 단군조선 번한의 수도이던 오덕지(五德地) 중 지금의 영정하 가까이에 위치하였던 것이 되는 한성(汗城)일 가능성이 많은 것이 된다. 

후한시대에 요동군에서 제외되어 요동속국에 편입된 것으로 되는데, 요동속국에서는 험독(險瀆)이라 기록되고 있다. 

(10) 거취(居就) 

실위산과 실위수가 거취에서 나왔다 하며, 실위수는 북쪽으로 양평에 이르러 대량수로 합류하는 것이 된다. 

후한시대에는 거취현이 요동군에서 제외되었다. 

(11) 고현(高顯) 

후한시대에는 요동군에서 제외되어 현도군에 편입되었다. 

(12) 안시(安市) 

대요수(大遼水)가 요동군 망평현이라는 새방의 밖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안시(安市)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라고 하므로, 이 안시는 대요수인 지금의 영정하 하류에 위치한 것이 되어, 지금의 난하 유역에 위치하였던 고구려의 안시성(安市城)이 되는 단군조선의 번한 오덕지(五德地) 중의 하나인 탕지(湯池)와는 다른 곳이 된다. 

(13) 무차(武次) 

왕망은 이 무차를 환자(桓次)라고 하였다. 

후한시대에는 요동군에서 제외되었다. 

(14) 평곽(平郭) 

이 평곽에는 철관과 염관이 있다 하는 바, 철과 소금은 특별관리 대상으로서 이 평곽이라는 현에 관리인을 두었다는 것이 된다. 

(15) 서안평(西安平) 

왕망은 이 서안평을 북안평(北安平)이라 하였다 하는 바, 남쪽에 또 다른 안평(安平)이 있다는 것이 된다. 

서안평 현의 북쪽에 소수맥(小水貊)이라는 강이 있고, 여기에는 구려(句麗)의 일족이 살았으며, 소수맥 강이 남쪽으로 흘렀던 것이 되는데, 이 소수맥이라는 강이 곧 소요수(小遼水)에 연결되고 서안평의 북쪽에서 서남쪽으로 흘러 대요수(大遼水)에 합류하는 강으로서, 이에 따라 서안평이 요동(遼東) 땅이 되는 것이며, 소요수는 지금의 영정하(永定河)에 합류하는 청수하(淸水河)가 되는 것이다. 

(16) 문(文) 

왕망은 이 문(文)이라는 현을 수정(受亭)이라고 하였다. 

(17) 번한(番汗) 

이 번한이라는 현(縣) 땅에 흐르는 패수(沛水)가 새방 밖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갔다 하며, 이 패수는 한수(汗水)라고도 기록되고 있다. 

위 문(文)이라는 현 땅과 이 번한이라는 현 땅이 서기전281년경에 연(燕)나라 진개(秦開)가 번조선과 국경을 삼은 만번한(滿番汗) 지역이 된다. 

(18) 답씨(沓氏) 

답수(沓水)라고도 한다. 

2. 요동속국(遼東屬國) - 후한서(後漢書) 군국지(軍國誌) 동이전(東夷傳) 

옛날의 한향(邯鄕)이었던 창요, 빈도, 도하 등 요서군(遼西郡)의 일부 땅과, 무려, 검독, 방 등 요동군(遼東郡)의 일부 땅을 한(漢)나라 안제(安帝:서기106년~서기125년) 때 요동속국이라 하였던 것이 된다. 

여기서 요동속국에 해당되기 이전의 원래 요서군이 되는 창요, 빈도, 도하 등의 땅은 서기120년경의 한나라 안제 때 요동이 되는 대요수인 지금의 영정하 동쪽 유역에 있었던 것이 된다. 

원래의 대요수는 지금의 영정하인 사실을 염두에 두면 한나라 안제 이전에 일시적으로 고대중국측에서 요수(遼水)라 한 강이 영정하 동쪽으로 옮겨졌던 것이 되어 고하(沽河)나 난하(灤河)였을 가능성이 있게 된다. 

즉, 이전에는 요서군에 속하였다가 요동속국에 속한 것이 되는데, 대요수인 지금의 영정하 동쪽에 위치한 땅이 되어, 연(燕)과 진(秦)나라 때에는 요동군에 속하였다가, 요수가 동쪽으로 고하(沽河)나 난하(灤河)로 옮겨진 때에는 요서군에 속하였던 것이, 다시 요수가 서쪽으로 고하(沽河)나 영정하(永定河)로 옮겨진 때에는 요동에 속한 것이 되는 것이다. 

(1) 창요(昌遼) 

옛날의 천요(天遼)이며 요서군(遼西郡)에 속하였다. 

요수(遼水)가 동쪽이나 서쪽으로 이동됨에 따라, 원래 요동에 속하였다가 다시 요서에 속하였으며, 이때에 이르러 다시 요동에 속한 것이 된다. 

(2) 빈도(賓徒) 

옛날에는 요서군(遼西郡)에 속하였다. 

요수(遼水)가 동쪽이나 서쪽으로 이동됨에 따라, 원래 요동에 속하였다가 다시 요서에 속하였으며, 이때에 이르러 다시 요동에 속한 것이 된다. 

(3) 도하(徒河) 

옛날에는 요서군(遼西郡)에 속하였다. 

요수(遼水)가 동쪽이나 서쪽으로 이동됨에 따라, 원래 요동에 속하였다가 다시 요서에 속하였으며, 이때에 이르러 다시 요동에 속한 것이 된다. 

(4) 무려(無慮) 

이 무려 현에 의무려산(醫無慮山)이 있다고 하며, 진(秦)나라 때 설치된 원래의 요동군(遼東郡)에 속하였다. 

이 무려라는 땅은 원래부터 요동에 속하였으며, 이때에 이르러 요동속국에 속한 것이 된다. 

(5) 험독(險瀆) 

위만(衛滿)이 도읍하였던 왕검(王儉)이라 하나, 위치상으로는 위만의 수도이던 험독(險瀆)이 아니라, 패수(浿水)이던 난하(灤河)의 서쪽으로 지금의 영정하(永定河) 또는 고하(沽河)의 동쪽에 위치하면서 당시까지 왕검성(王儉城)이라 불렸던 단군조선 번한(番韓)의 다섯 수도인 오덕지(五德地) 중의 하나가 된다. 한성(汗城)일 가능성이 많다. 

서기전221년경 진(秦)나라가 설치한 요동군(遼東郡)에 속하였던 검독(儉瀆)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즉, 검독은 험독(險瀆)의 오기(誤記)이거나 다른 표기가 되는 것이다. 

(6) 방(房) 

원래 진(秦)나라 때 설치된 요동군(遼東郡)에 속하였다. 

이 방이라는 땅은 원래부터 요동에 속하였으며, 이때에 이르러 요동속국에 속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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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사무총장.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동안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1. 홍익인간(弘益人間) 천부(天符)의 역사는 마고성(麻姑城:파미르고원)의 마고(麻姑)시대인 서기전70378년 계해년(癸亥年)부터 시작되었음을 최초로 밝혔음. 
2. 역법(曆法)이 시작된 해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585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3. 황궁씨를 이은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다는 것임을 밝혔음. 
4.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무한조화순환역(無限造化循環易), 음양오행(陰陽五行), 태양태음성력(太陽太陰星曆), 단군조선의 정치행정 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배달나라 시대의 음양오행수리역(陰陽五行數理易)이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5.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히고,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으며,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에게 제(祭)를 올리는 권한을 가진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있었던 당요(唐堯)의 전란(戰亂)으로 인한 단군왕검(檀君王儉)의 동북 아사달로의 이동과정임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천자로 불리는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의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인 천자(天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우 치수기념 부루공덕 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여, 서기전2267년 이후 우(禹)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겨 남악(南嶽) 형산(衡山)에 세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추장(酋長)의 후손임을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최초 해독학자 허대동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 해독의 검증에 참여하여 첨수도(尖首刀),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상형 및 표음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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