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뿌리를 찾아서)/홍익인간 7만년 역사

[홍익인간 292] 고구려(高句麗) 연대기 1

양해천 2018. 1. 22. 13:07

[홍익인간 292] 고구려(高句麗) 연대기 1

2012년 04월 23일 (월) 08:05:34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1. 제1대 고주몽(高朱蒙) 동명성제(東明聖帝:서기전37년~서기전19년) 

서기전80년 7월경 북부여의 제후인 옥저후(沃沮侯) 고모수(高慕漱:해모수, 일명 불리지)가 서압록(西鴨綠)을 지나다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만나 혼인하였다. 

여기서 고모수는 곧 해모수로서 북부여 시조 해모수(解慕漱)의 증손(曾孫)으로서 이름이 같은데, 해모수의 둘째 아들인 고구려후(高句麗侯) 즉 고리군왕(藁離郡王) 고진(高振)의 손자가 된다. 

여기의 서압록은 지금의 요하(遼河)를 가리키며, 지금의 압록강은 당시 동압록(東鴨綠)이다. 지금의 요하는 서기980년 이후에 거란의 요(遼)나라가 원래의 수도이던 난하 최상류의 임황(臨潢) 즉 서안평(西安平)에서 수도를 동쪽으로 옮기면서 서압록이 요하라고 불린 것이 된다. 이로써 요하 동쪽의 반도가 요동반도로 불리는 것이다. 한편, 서압록(西鴨綠)이 압록(鴨綠)의 서쪽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동압록인 지금의 압록강의 서쪽 지역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단군조선의 옥저국(沃沮國)은 동압록 즉 지금의 압록강 이북 지역에 위치하는 제후국이 되는데, 부여(夫餘)와 숙신(肅愼)의 남쪽이자 동개마(東蓋馬)인 백두산 동쪽에 있는 예국(濊國)의 서쪽에 위치하고, 지금의 요동반도 동쪽에 해당하는 지역이 된다. 

북부여 시대의 옥저국이 단군조선 땅의 옥저와 동일한 것인지가 불명인데, 서기전80년경의 북부여 시대에 옥저후 불리지가 관할하던 옥저 땅이 서압록 북부지역이었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북부여 시대에 정책적으로 옥저라는 땅의 명칭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옮길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편, 서압록(西鴨綠)이 압록(鴨綠)의 서쪽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동압록인 지금의 압록강의 서쪽 지역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어, 북부여 시대의 옥저와 단군조선 시대의 옥저 땅이 일치하게 된다. 

당시에 위 하백(河伯)은 옥저후 불리지가 지나가던 서압록(西鴨綠)의 물을 담당한 벼슬이 된다. 

<고주몽 탄생> 

서기전79년 임인년(壬寅年) 5월 5일 고주몽(高朱蒙, 해주몽)이 탄생하였다. 이때는 한(漢)나라 제7대 소제(昭帝) 8년으로 원봉(元封) 2년이 되는 해이다. 

아마도 고주몽은 어머니 유화부인의 친정이 되는 하백의 집에서 태어난 것이 될 것이다. 서기전79년에 동부여 땅인 분릉(芬陵)에서 태어났다라고 하거나, 동부여왕 해부루(解夫婁)가 유화부인을 궁으로 데리고 가서 깊숙한 곳에 가두어버렸다고 하는 기록이 있으나, 이들 기록은 정확한 것이 아닐 것인데, 동부여에서 유화부인이 닷되(五升)되는 알을 낳았다라는 기록이 비유적으로 5세였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즉, 유화부인은 고주몽이 어릴 때 불리지의 고향이 되는 북부여의 웅심산 지역의 서란(舒蘭)으로 간 것이며, 이후 고주몽을 데리고 사방을 주유하다가 고주몽의 나이가 5세일 때 해부루를 따라 동부여로 간 것이 된다. 

<동부여에서의 생활> 

서기전75년경 불리지(弗離支)가 죽으니 유화부인은 아들 주몽을 데리고 북부여의 웅심산(熊心山)의 서란(舒蘭)으로 돌아왔으며, 고주몽이 성장하자 사방을 주유하다가 가섭원(迦葉原:동부여 길림)을 택하여 살게 되었다. 

여기서, 불리지가 죽은 것은 고주몽이 어릴 때가 되는데, 아마도 고주몽이 5세가 되는 서기전75년경으로 이때는 북부여 제6대 고두막 천왕 시절이 되는 바, 아마도 불리지는 한(漢)나라와의 전쟁에서 전사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 이규보 선생이 지은 동명왕편(東明王篇)의 기록을 고려하면, 불리지가 유화부인의 아버지인 하백(河伯)과 술내기로 술을 마시거나, 도술(道術) 시합 또는 대련(對鍊)을 하던 중 사망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게 된다. 

웅심산(熊心山)은 서기전239년 5월 5일에 군사를 일으켜 북부여를 시작한 해모수의 근거지였는데, 개마산(蓋馬山)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대흥안령산맥에 있고 상춘의 서쪽에 위치한 것이 된다. 

유화부인이 남편 불리지가 사망하자 아들 고주몽을 데리고 웅심산의 서란으로 가서 살았던 것이며, 고주몽이 성장하자 사방을 돌아다니며 살았던 것이 되고, 고주몽이 5세 때에 동부여왕 해부루를 만나 가섭원으로 따라가 동부여에 살게 되었던 것이 된다. 고주몽의 아버지 불리지(고모수, 해모수)는 동부여왕 해부루와는 6촌 형제가 된다. 

<7세에 백발백중> 

서기전73년 동부여에서 고주몽이 7세가 되자 활을 스스로 만들어 쏘니 백발백중이었다. 이로써 이름이 주몽(朱蒙)이 되었다. 주몽이라는 말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말지기 생활> 

서기전65년경 고주몽이 약 15세가 되자 동부여 왕실의 말지기로 임명되었다. 이때 동부여왕은 해부루이다. 동부여 제1대 왕인 해부루는 서기전86년부터 서기전48년까지 재위하였다. 

이후 고주몽은 동부여의 왕실과 관료들로부터 시기의 대상이 되어 미움을 싸게 되고 급기야 신변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때 동부여 왕은 해부루이며, 왕자로는 양자(養子)인 금와(金蛙)가 있고, 금와의 아들로는 대소(帶素)와 그 형제들이 있었다. 

이때 금와는 고주몽과 거의 연배가 비슷하였던 것이 되는데, 서기전77년에 해부루왕이 산천에 기도하러 갔다가 금와를 얻었는데, 이때 금와는 어렸을 것임이 분명하므로 3세~10세였다고 보면, 서기전80년~서기전86년생이 되어 고주몽보다는 1세~8세정도 많은 것이 된다. 서기전60년에는 고주몽이 20세이며, 금와는 21세~28세 정도로서 아들을 여럿 두었던 것이 되는데, 큰 아들이 5세 정도에서 많아도 10세 정도 될 것인 바, 금와의 큰 아들인 대소(帶素)는 고주몽과는 10세~15세 정도 차이가 나게 된다. 

<동부여를 탈출하다> 

서기전59년 고주몽이 21세 때에, 고주몽은 어머니 유화부인의 명을 받아 예씨부인과 아들 유리(琉璃)를 동부여에 어머니와 함께 둔 채, 동부여에서 사귄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와 함께 남동쪽으로 피하였다. 

이리하여 남동쪽으로 피하여 가던 중 분릉수(芬陵水:엄리대수, 엄사수)에 이르러 건너려고 하였으나, 다리가 없으므로 뒤쫓아 오는 군사들에게 몰리던 차에, 고주몽이 “나는 천제자(天帝子)요, 하백(河伯)의 외손(外孫)이다! 오늘 도주함에 추격병이 다가오는데 어찌하란 말이냐”하며 큰 소리로 외치니, 마침 그곳에서 고기를 잡던 배들이 몰려와서 무사히 구원을 하였던 것이다. 

고기잡이 백성은 하백(河伯)의 다스림을 받으므로 고주몽의 외침에 상조(相助)한 것이 되는데,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하백신(河伯神)의 다스림을 받는 물고기와 자라 따위가 떠오르고, 갈대가 엮여져 다리를 만들었다라고 비유적으로 신비적으로 적기도 한 것이 된다. 

분릉수는 분릉 즉 동부여 지역을 흐르는 강이 되는데 지금의 길림을 통하는 강이 되며, 엄리대수(淹利大水)라고도 불렸던 것이 된다. 엄리대수를 엄사수라고도 적는데, 엄리는 크다라는 뜻을 가진 어리, 아리의 이두식 표기가 아닌가 한다. 엄리대수의 대수(大水)가 곧 아리수, 큰강을 뜻하는 말이기도 한데, 분릉수 중에서 특별히 붙인 강이름이 될 것이다. 실제로 길림의 남동쪽에는 큰 호수가 있으며 남쪽 또는 남동쪽으로 강이 이어져 있다. 

<일곱 의인(義人)의 다물흥방 맹세> 

서기전59년 고주몽과 오이, 마리, 협보가 함께 졸본으로 가던 중, 모둔곡(毛屯谷)에서 재사(再思), 무골(武骨), 묵거(黙居)를 만났으며, 이 7명의 의인(義人)이 덕우(德友)가 되어 무리들에게 천명(天命)을 받들고자 한다며 알리고서, 소와 돼지와 양의 피로써 삼신(三神)에게 제(祭)를 올려 고하며 다물흥방(多勿興邦)을 맹세하였던 것이다. 

------------------------------- 
[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사무총장.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동안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1. 홍익인간(弘益人間) 천부(天符)의 역사는 마고성(麻姑城:파미르고원)의 마고(麻姑)시대인 서기전70378년 계해년(癸亥年)부터 시작되었음을 최초로 밝혔음. 
2. 역법(曆法)이 시작된 해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585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3. 황궁씨를 이은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다는 것임을 밝혔음. 
4.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무한조화순환역(無限造化循環易), 음양오행(陰陽五行), 태양태음성력(太陽太陰星曆), 단군조선의 정치행정 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배달나라 시대의 음양오행수리역(陰陽五行數理易)이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5.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히고,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으며,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에게 제(祭)를 올리는 권한을 가진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있었던 당요(唐堯)의 전란(戰亂)으로 인한 단군왕검(檀君王儉)의 동북 아사달로의 이동과정임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천자로 불리는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의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인 천자(天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우 치수기념 부루공덕 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여, 서기전2267년 이후 우(禹)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겨 남악(南嶽) 형산(衡山)에 세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추장(酋長)의 후손임을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최초 해독학자 허대동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 해독의 검증에 참여하여 첨수도(尖首刀),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상형 및 표음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

천산(天山)의 다른기사 보기
ⓒ 데일리전북(http://www.dailyjeonbuk.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