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뿌리를 찾아서)/홍익인간 7만년 역사

[홍익인간 291] 사국(四國)시대 역사 개관

양해천 2018. 1. 22. 13:06

[홍익인간 291] 사국(四國)시대 역사 개관

2012년 04월 22일 (일) 11:05:47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북부여와 후삼한 시대 뒤에는, 북부여(北扶餘)를 계승한 고구려와, 단군조선의 마한(馬韓) 땅이던 한반도에 세워진 진한(辰韓), 마한(馬韓), 변한(弁韓)의 후삼한(後三韓)을 계승한 신라, 백제, 가야로 이어지는 사국시대(四國時代)가 된다. 

1. 고구려(高句麗) 역사 개관 

가. 건국 

고구려 개국시조는 고주몽(高朱蒙) 동명성제(東明聖帝)이다. 

서기전239년 4월 8일에 시작된 북부여는 서기전58년에 북부여 제7대 고무서(高無胥) 천왕의 유언을 받들어 단군이 된 고주몽에 이르렀고, 이에 고주몽이 서기전57년에 즉위하여 이후 서기전108년에 시작된 동명왕(東明王) 고두막한(高豆莫汗)의 다물업(多勿業)을 계승하고 실현하기 위하여 나라의 살림을 불리고 군사력을 증강시겼다. 

특히, 연타발은 서기전86년생으로서 고주몽 성제보다 7세 위가 되는데, 뒤에 무리를 이끌고 구려하(九黎河:서압록 최상류, 지금의 서요하 상류)로 옮겨 고기잡이와 소금장사를 하게 되더니 고주몽 성제가 서기전27년에 북옥저를 정벌할 때 양곡 5,000석을 바쳤다. 또, 서기전26년에 서울을 눌현으로 옮길 때는 앞질러 자납(自納)을 원하여 유망민(流亡民)을 초무하고 왕사(王事)를 권하여 공을 세웠으니 좌원(坐原)에 봉작을 받았다. 

고주몽 단군은 서기전37년에 고구려를 창건하여, 본격적으로 단군조선의 고토를 회복하기 위한 다물정책(多勿政策)을 시행하였다. 서기전28년부터 본격 시작된 다물정책은 고구려의 일관된 정책으로서 계속되었다. 

나. 과정 

고구려 역사에서 소위 요동요서(遼東遼西) 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정책은 제2대 유리명제가 국내성으로 천도하고, 제3대 대무신열제가 평양의 낙랑국을 멸망시키고, 제5대 모본제(慕本帝)가 요동지역을 회복하고, 제6대 태조무열제가 서기55년에 요서10성을 축조하여 현도군과 낙랑군을 공격하고, 제7대 차대제가 서기168년에 요동을 정벌하고, 제10대 산상제가 서기197년에 요동, 현도, 낙랑을 정벌하고, 제11대 동천제가 서기242년에 서안평을 공격하고, 제12대 미천제가 서안평을 점령하고 서기313년에 대방군, 낙랑군, 현도군을 완전히 축출하는 등 요동요서 지역에서 명멸하였던 여러 나라들과의 전쟁 속에서 절대 포기되지 않았으며, 결국 서기313년에 서기전108년부터 거론되는 낙랑군, 현도군과 서기204년에 설치된 대방군을 완전히 축출시켰던 것이다. 

제11대 동천제가 서기246년에 위(魏)나라 관구검의 공격을 받아 환도성이 점령당하여 평양으로 천도하고, 제16대 고국원제가 서기342년에 선비족인 전연(前燕)의 침입을 받아 환도성이 함락되기도 하고 백제의 근초고왕에게 한강전투에서 전사하기도 하였으나, 제19대 광개토호태황(廣開土好太皇) 때에 이르러 거란, 비려, 백제, 가야, 신라, 이왜를 아우르는 광대한 영역을 확보하였으며, 제21대 문자제(文咨帝) 때인 서기494년에 고구려의 서부에서 활동하던 동부여를 멸망시켜 복속시키고, 백제 땅이던 요서군과 진평군과 산동~양자강 유역의 제노오월(齊魯吳越)의 땅을 복속시켜 최대 판도를 이루었다. 

또, 제25대 평강제 때인 서기576년에는 북주(北周)를 대파하여 산서성(山西省)의 유림진(楡林鎭) 이동을 평정하였으며, 제26대 영양제 때는 산동지역의 등주(登州)와 요서지역을 공격하고, 수(隋)나라의 3차에 걸친 침입을 막아내면서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으로 수나라 군사를 몰살시키는 등으로 결국 수나라가 망하게 하였으며, 제28대 보장제 대에는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서기645년에 당나라의 침입을 역공으로 반격, 추격하여 당나라 장안(長安)에 입성하고서 이세민으로부터 항복을 받아 산서, 강좌, 하북, 산동 등을 고구려에 복속시켰고, 연이은 당나라의 침입을 실패하게 하였다. 

다. 수도 

고구려의 수도는 서기전37년 건국당시에는 북부여(졸본부여)의 수도로서 부여의 동남부에 위치하였던 졸본(卒本:忽本)이었고, 서기전26년에는 북부여의 상춘(常春)으로 천도하였으며, 제2대 유리명제가 서기1년~서기3년경에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하였으며, 서기246년에 위 관구검의 침략으로 평양(平壤)으로 천도하였고, 다시 국내성의 환도산성으로 복귀하였던 것이 되며, 제20대 장수제가 서기전427년에 평양으로 천도하였던 것이다. 

국내성의 산위에는 제1, 제2, 제3의 환도성이 있었으며, 고구려 초기에는 졸본, 상춘, 국내성이라는 삼경(三京)이 있었고, 여기에 다시 대동강의 평양(平壤)과, 요동의 평양으로 추정되는 봉황성(鳳凰城)을 합하면 모두 5경(京)이 될 것이다. 

라. 역년 

서기657년에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세상을 떠난 후 비밀에 부쳐졌다가 나당연합군이 서기668년에 고구려를 총공격하게 되었는데, 이에 고구려는 1년을 항전한 끝에 서기668년 9월 21일에 제28대 보장제(寶藏帝)가 나당연합군에 항복함으로써, 서기전239년부터 시작된 고구려의 역사는 907년으로 마감하였던 것이다. 

이후 서기670년에 고연무와 검모잠이 안승을 왕으로 세워 고구려 부흥운동이 일어났으나 안승(安勝)이 검모잠을 살해함으로써 실패하였고, 보장제가 별도로 펼친 부흥운동은 서기677년까지 펼쳐졌으나 실패함으로써 이에 고구려는 서기668년에 후고구려라 칭한 대중상(大仲象)에 의하여 대조영(大祚榮)의 대진국(大震國)으로 계승되었던 것이 된다. 


2. 신라(新羅) 역사 개관 

가. 건국 

서기전209년에 시작된 진한(辰韓)은 서기전57년에 6부(部)의 촌장이던 소벌도리(蘇伐都利)가 13세이던 박혁거세(朴赫居世)를 거서간(居西干)으로 추대함으로써 신라(新羅)로 계승되었다. 

박혁거세는 북부여 고두막 천왕 시절에 거서간이었던 아버지의 직을 세습한 것이 되는데, 박혁거세의 어머니 파소가 어린 혁거세와 측근의 일행을 데리고 북부여를 떠나 한반도의 진한 땅으로 왔던 것이며, 박혁거세의 출신성분을 알고 있던 진한의 6부 촌장들이 화백(和白)을 통하여 왕(王)으로 옹립한 것이 된다. 거서간(居西干)이라는 직책은 북부여의 서부(西部)를 방어하던 방어장(防禦長)으로서 북부여 천왕(天王)의 제후가 되는 천자(天子)에 해당한다. 

나. 과정 

신라는 박혁거세 거서간 시대부터 서기500년경까지 소지 마립간 시대까지 줄곧 왜(倭)의 침입을 받으면서, 왜와 수호를 맺거나, 고구려의 광개토호태황의 구원으로 백제, 가야, 왜의 연합군을 물리치기도 하였다. 

서기512년에 제22대 지증왕 때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함으로써 울릉도와 독도를 영토로 확보하였으며, 서기532년에 제23대 법흥왕이 금관가야를 통합하고, 서기551년경에 제24대 진흥왕이 비사벌가야를 평정하고, 서기562년에 제24대 진흥왕 때 사다함이 대가야를 평정함으로써, 가야를 모두 신라에 통합시켰다. 

진흥왕은 서기551년에 단양적성비를 건립하였으며, 서기561년에는 청녕순수비를 세웠고, 서기568년에는 북한산비, 황초령비, 마운령비 등의 순수비를 각각 건립하였다. 

진흥왕은 서기576년에 신라의 화랑제도를 시작하였는데 먼저 원화(源花)를 설치하였다. 

서기660년에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서기668년에는 고구려를 멸망시켰으며, 서기676년에 당나라 세력을 모두 축출함으로써, 북쪽의 고구려의 계승국인 대진국과 남북국 시대를 열게 되었다. 서기676년부터 702년까지 신라는 당나라와 국교를 단절하기도 하였다. 

서기685년에 신라는 9주(州) 5소경(小京) 제도를 시행하였다. 5소경은 금성 외에 5곳의 작은 수도를 둔 것인데, 김해의 금관경, 남원의 남원경, 청주의 서원경, 충주의 중원경, 원주의 북원경이다. 

다. 수도 

신라의 수도는 줄곧 서라벌(徐羅伐:서울) 즉 금성(金城)으로서 동경(東京:새벌:서라벌)이었다. 한반도 남반부의 통일 후에는 5소경(小京)을 두어 백제와 고구려 땅이던 지역의 정세를 안정시켰다. 

신라후기에 들어 잦은 반란이 있었으며, 결국 서기892년에는 견훤이 후백제를 시작하였고, 서기901년에는 궁예가 후고구려를 시작하여 소위 후삼국시대가 되었다. 

라. 역년 

신라는 서기전57년에 시작되어 서기전935년에 제56대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귀부함으로써 종말을 고하였는데 992년의 역사를 가진다. 

3. 백제(百濟) 역사 개관 

가. 건국 

서기전42년에 고주몽의 북부여 시대에 졸본(卒本)을 떠난 고주몽의 제2부인인 소서노(召西弩)는 진번(眞番) 땅의 패대(浿帶)지역에 자리잡아 개척하여 서기전31년에 고구려의 고주몽 성제로부터 어하라(於瑕羅)로 책봉되어 제후국의 왕이 되었다. 

서기전19년에 소서노가 훙(薨)하자 우태와의 사이에 난 장자 비류(沸流)가 대를 이었는데, 이때 고주몽과의 사이에 난 온조(溫祚)는 측근을 데리고 다시 남하하여 한반도의 한강유역으로 옮겨와 마한(馬韓)으로부터 땅을 할양받아 하남(河南)에 위지성(尉支城)을 쌓고 나라를 세웠으니, 10명의 신하와 함께 세운 나라로서 십제(十濟)라 한다. 

이후 비류의 어하라국은 계속 흥하지 못하고 온조의 나라인 십제에 귀부하게 되니 온조 백제(百濟)라 부르게 된다. 

온조는 고주몽(해주몽)의 아들이므로 해씨(解氏)이기도 하나, 고구려가 아닌 그 이전의 졸본 땅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부여씨(夫餘氏)를 성시로 삼았다. 

나. 과정 

서기전18년에 온조왕은 동명왕묘를 세우고, 서기전2년에는 국모(國母)가 되는 소서노(召西弩)의 제사를 모셨으며, 서기9년에는 마한(馬韓)을 멸망시켰다. 

서기246년에는 제8대 고이왕이 위나라 관구검이 고구려를 칠 때 낙랑군(樂浪郡)을 습격하기도 하였으며, 서기286년 제9대 책계왕은 대방군(帶方郡)을 원조하였고, 서기304년에 제10대 분서왕이 낙랑군의 서쪽 현(縣)을 습격하여 공취하였다가 낙랑군의 자객에게 피살되었다. 

제13대 근초고왕은 대방군의 옛 땅을 점령하였고, 마한을 완전히 정복하였으며, 탐라(耽羅:제주도)를 복속시켰으며, 요서지역과 산동지역과 왜(倭)를 식민지로 삼았다. 

서기392년에 제16대 진사왕이 고구려 광개토호태황의 군사 4만에게 10개성을 함락당하고 한수(漢水:아리수:한강) 이북을 잃었으며, 서기395년에는 패수(浿水)에서 8,000명이 전사하였고, 서기397년에는 제17대 아신왕이 58개성을 잃었다. 

서기433년에 고구려의 장수제가 남하정책을 펼치자 신라의 눌지왕과 동맹을 맺었으며, 서기475년에는 제21대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제에게 전사하였다. 

서기498년에 제24대 동성왕이 신라의 제21대 소지왕과 결혼동맹을 맺었으며, 제25대 무령왕은 22담로를 설치하였다. 

서기554년에는 제26대 성왕이 신라의 관산성(옥천)을 공격하다 전사하여 나제동맹이 결렬되기도 하였다. 서기636년 제30대 무왕 때 신라에 잠입하였던 우소가 옥문지에서 사로잡히기도 하였다. 

서기660년에 나당연합군의 침입을 받아, 제31대 의자왕이 항복한 후, 복신과 도침이 왜에서 돌아온 왕자 풍(豊)을 옹립하여 부흥운동을 펼치며 왜의 원조를 받고, 흑치상지가 임존성에서 부흥운동을 펼쳤으나, 복신이 도침을 살해하고 왕자 풍이 복신을 살해하고 서기663년 8월에 백강전투에서 백제와 왜의 연합군이 나당연합군에 패하고 9월에 주류성이 항복함으로써, 또 흑치상지의 부흥운동에 실패함으로써, 백제의 부흥운동이 모두 실패로 끝났다. 

이에 왕자 풍은 왜(倭)로 되돌아갔으며, 서기672년에 천무왕(天武王)이 되어 국호를 왜(倭)에서 일본(日本)으로 고쳤다. 

다. 수도 

서기전18년에 한산(漢山) 아래 하남(河南)에 자리잡은 위지성(尉支城)에서 서기전5년에 한성(漢城)으로 천도하였으며, 서기371년에 한산(漢山)으로 천도하였고, 서기475년에 웅진(熊津:곰나루)으로 천도하였으며, 서기538년에 사비(부여)로 천도하여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라 하였다. 

여기서 위지성은 풍납토성으로 추정되고 한성은 몽촌토성으로 보이며, 한산은 지금의 남한산성 지역이 되고, 웅진은 지금의 공주(公州:公山城:공산성)가 되며. 사비는 지금의 부여(夫餘)가 된다. 이리하여 지금의 서울인 한성(漢城) 지역에서의 수도는 서기전18년부터 서기475년까지 493년의 역사를 가진다. 

백제 초중기에 위지성(위레성), 한성(漢城), 한산(漢山)의 3경이 있었던 것이고, 후기에 웅진과 사비가 수도가 되어 백제에는 모두 5개의 수도가 있었던 것이 된다. 이는 한배달조선 시대의 오가(五加)즉 오부(五部)제도와 번한 5덕지(五德地:5경)와 고구려의 수도 5경, 대진국의 5경제도, 신라의 5소경 제도와 일맥상통하는 것이 된다. 

라. 역년 

백제는 서기전18년에 온조왕에 의하여 시작되어 서기660년까지 31대 678년의 역사를 가진다. 여기에 백제 부흥운동 가간을 합하면 서기663년까지 681년의 역사가 된다. 


4. 가야(伽倻) 역사 개관 

가. 건국 

서기전209년경 진한(辰韓)과 거의 동시에 세워진 변한(弁韓)은 9간(干)의 화백정치로 이어져 오다가 서기42년에 김수로왕과 그 5형제에 의하여 금관가야(金官伽倻), 대가야(大伽倻:임나가라), 아라가야(阿羅伽倻:안라), 소가야(小伽倻), 성산가야(星山伽倻), 고령가야(古寧伽倻) 등의 6가야가 되었다. 

김수로왕은 서기전121년에 한무제(漢武帝)에게 항복한 흉노(匈奴) 휴도왕(休屠王) 금류(金留)의 아들 금륜(金倫)의 6세손(世孫)이다. 금륜은 한무제의 유조(遺詔)로 투후(秺侯)에 봉해졌던 휴도왕의 태자 김일제(金日磾)의 아우이다. 

김수로왕은 서기23년 3월 3일생이며 20세이던 서기42년 3월 15일에 금관가야왕이 되었고, 서기48년에 26세에 아유타국 후예이며 한(漢)나라의 보주(普州) 출신으로서 가야로 온, 서기33년 7월 7일생으로 16세이던 허황옥(許黃玉)과 혼인하여 모두 12명의 왕자와 2명의 공주를 두었다. 거등왕자가 태자이며, 둘째는 서기65년경에 신라의 서라벌인 경주 땅에 진출하여 경주김씨의 시조가 된 김알지(金閼知)라고도 전한다. 

또, 2명의 왕자는 어머니 허황옥의 성씨를 받아 허씨가 되었으며, 7 왕자는 외삼촌인 장유화상을 따라 지리산으로 들어가 칠불이 되었는데 지금의 칠불사(七佛寺)에 모셔져 있다고 한다. 

나. 과정 

서기162년에 거등 태자가 섭정을 하였는데 이때 김수로왕은 140세였으며, 서기189년 3월 1일에 허황옥 황후가 157세로 돌아가시고, 서기199년 3월 23일에 태상황으로 38년 재위하여 합158년 재위한 김수로왕은 177세로 붕하였다. 

신라와 전쟁을 하기도 하고 신라를 괴롭히던 왜(倭)를 치기도 하였는데, 고구려의 광개토호태황 시절에는 안라(安羅:아라가야)가 왜와 더불어 신라를 괴롭혀 토벌을 당하였고, 급기야는 서기400년에 고구려의 광개토호태황이 신라를 도와 왜(倭)와 안라(安羅)를 토벌하여 지금의 대마도(對馬島)까지 평정하고, 이어서 구주(九州:큐슈), 본주(本州:혼슈)까지 정복하여 복속시켰던 것인데, 이때는 대마도 및 구주의 안라(아라가야)와 본주의 왜가 고구려의 표적이 되었던 것이 된다. 

서기481년에는 고구려와 말갈이 신라의 북변을 공략할 때 백제와 가야가 연합하여 고구려를 격파하기도 하였다. 

서기506년 제9대 겸지왕 때에 신라의 제22대 지증왕이 소가야(고성)를 정벌하였으며, 서기515년에는 신라의 제23대 법흥왕이 아라가야(함안)를 토벌하였고, 서기532년에 신라 법흥왕이 금관가야의 항복을 받았고, 서기551년경에 비사벌가야(창녕)를 병합하였으며, 서기562년에 대가야(임나가라)를 완전히 토벌하여, 이에 가야는 모두 신라에 병합되었다. 고령가야, 성산가야는 금관가야가 항복한 서기532년 이전에 이미 망한 것으로 된다. 

다. 수도 

6가야는 하나로 통일된 국가가 아니라 이전의 9간(干)이 화백(和白)으로 다스리던 변한(弁韓)시대의 정치체제를 유지한 것으로 되는데, 이에 따라 최소한 6개의 수도가 있었던 것이 된다. 

금관가야의 수도는 김해(金海), 대가야의 수도는 고령(高靈), 성산가야의 수도는 성주(星州), 아라가야의 수도는 함안(咸安), 소가야의 수도는 고성(固城), 고령가야의 수도는 진주(珍州)이다. 6가야 외에 기록되는 비사벌가야의 수도는 지금의 창녕(昌寧)이다. 

라. 역년 

가야라는 명맥이 이어진 역사는 서기42년부터 대가야가 멸망한 서기562년까지 521년이 된다. 김수로왕의 금관가야는 서기42년부터 서기532년까지 10대왕 491년의 역사가 된다. 

마. 진골(眞骨) 편입 

가야세력은 신라에 병합되면서 그 왕족은 신라의 종종(宗姓)인 김씨(金氏)로 사성받거나 하여 진골로 편입되었던 것이 된다. 금관가야의 왕족인 김씨는 신라의 김씨와 원래부터 종성이면서 진골로 편입된 것이 된다. 

창녕에 위치하였던 비사벌가야(比斯伐伽倻:빛벌가야:비자발)는 그 전신이 후삼한 시대 변진(弁辰) 24국 중의 불사국(不斯國)으로서 초기 6가야에는 속하지 아니하나 가야세력에 포함된 것으로 되는 바, 아마도 가야시대 초기에는 대가야 세력에 포함되었다가 후기에 이르러 독자적으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 왕족은 원래 조씨(曺氏)로서 서기551년경에 신라에 병합될 당시에 진흥왕으로부터 김씨(金氏)를 사성받아 진골(眞骨)로 편입되었다가, 서기631년 2월에 진평왕으로부터 원래 성씨인 조씨(曺氏)로 사성받아 복원(復元)되었던 것이 된다. 

가야를 병합한 신라는, 선덕여왕 시대에 가야세력이 신라의 중추세력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고구려, 백제로부터의 생존위협을 벗어나, 군사적으로는 김유신이, 외교적으로는 김춘추가 활약하여 나당연합군을 결성하고 한반도 중부 이남지역을 통일함으로써 동족간의 전쟁을 마감하게 되었는데, 고구려의 계승국인 북국인 대진국(大震國:발해)과는 서기720년경까지 대적적이었으나, 황제국(皇帝國)으로서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리던 대진국에 조공을 하였던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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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서기전70378년 계해년(癸亥年)부터 시작된 [홍익인간 7만년 역사]를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의 사국시대 역사를 개관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하여 기획적인 역사기술을 마치고자 합니다. 이후 약40회에 걸쳐서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대진국(발해), 고려, 조선의 역사를 연대기로 정리하되, 고구려, 대진국, 고려, 조선의 연대기를 좀더 상술하였으니, 역사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께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사국시대 이후의 상세하고도 분석적이며 종합적인 역사기술은 많은 연구자님들의 노고에 맡기기로 하며, 차후 기회가 된다면 연구결과를 내보이겠습니다. 

서기전70378년 계해년(癸亥年)부터 시작된 홍익인간의 역사는, 가야 초기인 서기42년 임인년(壬寅年)에 이르러 70420년의 역사를 가지며, 이후 대진-신라, 고려-요금원, 조선-청의 각 남북국 시대를 거치면서, 지금의 대한민국에 이르러 올해 임진년(壬辰年)은 천부(天符) 72390년이며, 한기(桓紀) 9209년이고, 개천(開天) 5909년이며, 단기(檀紀) 4345년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저의 글을 애독하여 주신 여러 귀하신 님들께 깊고 깊은 감사를 드리며, 앞으로도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에서 한해 2권이상 발행될 역사 관련 서적에 관심 기울여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올바른 우리의 역사가 하루빨리 정립되기를 기대하며, 님들의 건강과 행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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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사무총장.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동안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1. 홍익인간(弘益人間) 천부(天符)의 역사는 마고성(麻姑城:파미르고원)의 마고(麻姑)시대인 서기전70378년 계해년(癸亥年)부터 시작되었음을 최초로 밝혔음. 
2. 역법(曆法)이 시작된 해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585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3. 황궁씨를 이은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다는 것임을 밝혔음. 
4.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무한조화순환역(無限造化循環易), 음양오행(陰陽五行), 태양태음성력(太陽太陰星曆), 단군조선의 정치행정 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배달나라 시대의 음양오행수리역(陰陽五行數理易)이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5.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히고,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으며,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에게 제(祭)를 올리는 권한을 가진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있었던 당요(唐堯)의 전란(戰亂)으로 인한 단군왕검(檀君王儉)의 동북 아사달로의 이동과정임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천자로 불리는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의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인 천자(天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우 치수기념 부루공덕 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여, 서기전2267년 이후 우(禹)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겨 남악(南嶽) 형산(衡山)에 세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추장(酋長)의 후손임을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최초 해독학자 허대동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 해독의 검증에 참여하여 첨수도(尖首刀),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상형 및 표음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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