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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 295] 고구려(高句麗) 연대기 4

양해천 2018. 1. 22. 13:09

[홍익인간 295] 고구려(高句麗) 연대기 4

2012년 04월 26일 (목) 08:45:40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동부여 신하가 고구려에 투항하다> 

서기9년에 동부여(東夫餘)의 신하가 무리를 이끌고 와서 고구려에 투항하였다. 

동부여의 신하란 동부여 조정의 관리를 가리키는 것인데, 고구려에 투항하였다는 것에서 아마도 동부여 조정에 내분이 있었던 모양이다. 

<동부여 대소왕의 고구려 침공 실패> 

서기13년 계유년(癸酉年)에 대소왕이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학반령 밑에 이르러 무휼 왕자의 복병을 만나 크게 패하였다. 

무휼 왕자는 서기4년생이므로 서기13년은 10세였던 것이 된다. 즉 10세에 무휼 왕자가 군사를 이끌고 가서 동부여 대소왕의 군사를 직접 격파한 것이 된다. 

<무휼 왕자가 태자가 되다> 

서기14년에 유리명제는 무휼을 태자로 삼았다. 이때 무휼 태자는 11세였다. 

<왕망의 신나라 양맥과 고구려현을 점령하다> 

신(新)나라 왕망(王芒)이 흉노족을 치려고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군사를 내라 하니, 이에 유리명제가 오이, 마리에게 군사 2만을 주어 왕망에게 가다가 군사를 돌려 양맥과 고구려현을 쳐서 점령하였다. 

왕망은 서기8년에 한(漢)나라를 차지하여 신(新)을 세웠고 15년만인 서기23년에 후한에게 망하였다. 

3. 제3대 대무신열제(大武神烈帝:서기18년~서기44년) 

무휼 태자가 15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동부여 정복, 대소왕의 전사> 

서기22년 임오년(壬午年) 2월에 고구려가 나라의 힘을 다 모아서 동부여를 치니, 대소왕은 몸소 무리를 이끌고 출전하였는데, 진흙탕을 만나 대소왕의 말이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 고구려의 대장군 괴유가 바로 앞에 있다가 대소왕을 살해하였다. 동부여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는데 큰 안개가 7일 동안이나 계속되니 고구려 열제(대무신열제)는 몰래 병사를 이끌고 밤에 탈출하여 사잇길을 따라 도망쳐 달아나 버렸다. 

<대소왕의 아우가 갈사국을 세우다> 

서기22년 임오년(壬午年) 여름 4월에 동부여 대소왕의 아우는 따르는 무리 수백인을 데리고 길을 떠나 압록곡(鴨綠谷)에 이르러 해두왕(海頭王)이 사냥 나온 것을 보고 그를 죽이고 그 백성들을 취하여, 그 길로 갈사수(渴思水)의 변두리를 차지하고는 나라를 세워 왕이라 칭하니 갈사(渴思)라 한다. 

갈사국은 백두산의 동북쪽에 위치한 것이 되는데, 갈사수는 지금의 두만강 지류가 될 것이다. 

<대소왕의 종제를 연나부 왕으로 봉하고 낙씨를 하사하다> 

서기22년 가을 7월에 동부여왕 대소의 사촌 동생(從弟)이 여러 사람들에게 “선왕께서는 시해당하시고 나라는 망하여 백성들은 의지할 곳이 없다. 갈사는 두루 안락하기는 하지만 스스로 나라를 이루기 어렵고, 나 또한 재능과 지혜가 부족하여 나라를 새롭게 일으킬 수가 없으니, 차라리 항복함으로써 살기를 도모하리라”하고 옛 도읍의 백성 만여명을 데리고 고구려에 투항하니, 고구려는 그를 봉하여 왕으로 삼고 연나부(椽那部)에 안치하였다. 이때 연나부 왕의 등에 띠와 같은 무늬가 있었던 까닭에 낙(絡)씨 성을 하사하였다. 


대소왕의 사촌아우는 금와왕의 형제자매가 되고 해부루왕의 손자가 되는데, 해부루왕은 아들이 없어 금와를 양자로 삼았는 바, 결국 해부루왕의 딸의 아들이 되는 셈이다. 

갈사국은 압록곡 유역에 있는 나라가 되는데, 고구려 건국당시인 서기37년에는 동부여의 남동쪽에 위치한 졸본(卒本)이 수도였고, 서기전26년에는 북부여 땅인 상춘(常春:눌현)으로 옮겼고, 서기3년경에는 제2대 유리명제가 압록강 중류지역의 국내성(國內城:집안)으로 옮겼는 바, 국내성의 동쪽으로 백두산 동북쪽에 위치한 갈사수라는 강이 있는 지역이 된다. 서기68년에 고구려에 망하여 혼춘(琿春)을 중심으로 동부여(東夫餘)로 봉해진다. 

옛 도읍은 대소왕의 아우가 세운 갈사국 이전에 존재한 동부여의 도읍을 가리키는 것으로, 동부여의 원래 땅인 지금의 길림(吉林)을 가리킨다. 

연나부(椽那部)는 고구려의 5부 중에서 서부(西部)를 가리키는데, 국내성을 기준으로 하면 지금의 요동반도를 포함한 서편의 땅으로서 한(漢)나라와의 국경 동쪽 땅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낙씨의 연나부 부여가 뒤에 연(燕)나라 땅에 가까운 백랑곡으로 옮겨갔다 하는 바, 이 낙씨의 부여의 중심지는 지금의 난하 중류 동쪽 지역이 된다. 

안치(安置)는 역사적인 뜻으로 보아 옮겨서 강제로 묶어두는 금치(禁置)와도 비슷한 것이 되는데, 이때 고구려는 대소왕의 사촌 동생인 낙씨(絡氏)를 서부(西部)지역인 연나부의 일부 땅에 왕으로 봉한 것을 안치라고 표현한 것이 된다. 

낙씨의 부여는 서기120년경 이후에는 고구려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으로 한(漢)나라와 교류하면서 고구려의 서쪽에서 독립국으로 존재하다가, 서기494년에 고구려 문자제(文咨帝)에 의하여 고구려에 편입되어 나라가 사라졌는 바, 서기22년부터 서기494년까지 473년의 역사를 가진 것이 된다, 

<개마국과 구다국을 정복하다> 

서기26년에 개마국(蓋馬國)을 정복하니, 이웃의 구다국(勾茶國)이 항복하였다. 

여기 개마국은 서개마국 또는 북개마국으로서 고구려의 서북쪽에 있는 대흥안령산맥 부근에 있는 개마국과 구다국이며, 특히 구다국은 구다천국(勾茶川國)으로서 옛 한국(桓國)시대부터 내려온 나라가 된다. 지금의 백두산 남쪽에 있던 단군조선 때 봉해진 개마국은 아마도 후대에 동예(東濊)와 동옥저(東沃沮)에 속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의 침입> 

서기28년에 한(漢)나라의 요동태수가 수만의 군사로 침공하였다. 

이때 한나라의 요동은 지금의 영정하와 난하 사이에 있는 군(郡)이 된다. 

<낙랑국의 자명고를 찢게 하다> 

대무신열제와 갈사국왕의 손녀 사이에 태어난 호동왕자가 최리의 낙랑국 공주와 혼인한 후, 공주로 하여금 자명고를 찢게 하였다. 

여기 낙랑국은 최씨(崔氏)의 나라로서 북부여 시대인 서기전195년에 난하유역의 낙랑홀에서 최숭(崔崇)이 보물을 배에 싣고 한반도의 대동강 평양으로 와서 세운 나라가 되는데, 서기전169년경에는 북부여를 섬겼으나, 이후 북부여가 쇠퇴하자 독립국이 된 것으로 된다. 

<낙랑국을 공격하다> 

서기32년에 호동왕자는 대무신열제와 함께 낙랑국을 공격하였다. 

<호동왕자의 자결> 

대무신열제의 첫째 왕비가 아들을 낳은 후 호동왕자를 모함하여 자결케 하였다. 

<낙랑국 멸망> 

서기37년에 대무신열제가 낙랑국을 습격하여 멸망시키니 동압록(東鴨綠) 이남이 고구려에 속했는데, 오로지 해성(海城)의 남쪽 바다 근처의 여러 성들만은 아직 항복하지 않았다. 

여기서 해성(海城)은 장당경(藏唐京:심양) 남쪽에 있던 해성(海城)이 아니라, 지금의 압록강 이남에 있으면서 대무신열제가 멸망시킨 한반도 평양에 소재하였던 낙랑국의 남쪽에 위치한 성(城)으로서, 평양과 한강(漢江) 사이에 있는 지금의 황해도 해주(海州)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4. 제4대 민중제(閔中帝:서기44년~서기48년) 

태자 해우가 너무 어려 대무신열제의 아우 해색주가 즉위하였다. 

5. 제5대 모본제(慕本帝:서기48년~서기53년) 

대무신열제의 태자 해우가 즉위하였다. 

서기49년 봄에 제5대 모본제(慕本帝)가 한(漢)나라의 우북평(右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 등지를 공격하여 빼앗았다. 이때 고구려는 산서성(山西省)에 있는 태원(太原)의 북쪽 지역을 차지한 것이 되는데, 상곡은 태원의 북쪽에 위치하고, 우북평과 어양은 지금의 영정하와 고하에 걸치는 지역이 된다. 

서기53년 11월에 두로는 모본제가 폭정을 하여 시해하였다. 

6. 제6대 태조무열제(太祖武烈帝:서기53년~서기146년) 

유리명제의 손자 궁(서기46년~서기165년.120세)이 8세로 즉위하였으나 너무 어려 태후가 섭정하였는데, 태조무열제이다. 

제6대 태조무열제가 서기53년에 즉위하여 연호를 융무(隆武)라 하고, 졸본, 국내성, 제1환도성으로써 3경(京) 제도를 두었다. 옥저와 동예를 복속시켰다. 

<요서10성 축조> 

서기55년 제6대 태조무열제가 요서(遼西) 지역에 10성을 축조하여 한(漢)나라의 10성에 대비케 하였다. 고구려의 요서10성은 안시(安市), 석성(石城), 건안(建安), 건흥(建興), 요동(遼東), 풍성(豊城), 한성(韓城), 옥전보(玉田堡), 택성(澤城), 요택(遼澤)의 10성이다. 또 고려성(高麗城)을 하간현(河間縣) 서북 12리에 축조하였다. 

여기서 안시성(安市城)은 개평(開平:蓋平:당나라의 蓋州)의 동북쪽 70리에 있으며, 지금의 천안(遷安) 지역으로서 난하(灤河) 서편에 위치한 것이 된다. 고구려의 안시성은 단군조선의 요중 12성 중의 하나인 탕지성(湯池城)이며, 구안덕향이라 불리는 곳이고, 후대에 탕지보(蕩池堡)라고도 불린다. 서기전339년에 연나라가 번조선을 침공하였을 때 안촌홀(安村忽)과 관련되는 곳이 된다. 

석성(石城)은 건안의 서쪽 50리에, 

건안(建安)은 안시의 남쪽 70리에 있으며 당산(唐山)의 경내에 있다. 

건흥(建興)은 난하의 서쪽에, 

요동(遼東)은 창려(昌黎)의 남쪽에, 

풍성(豊城)은 안시의 서북 100리에 

한성(韓城)은 풍성의 남쪽 200리에 

옥전보(玉田堡)는 한성의 서남쪽 60리에 위치하며 옛 요동국이라고 한다. 

택성(澤城)은 요택의 서남쪽 50리에, 

요택(遼澤)은 황하의 북류좌안에 있다. 

<동옥저를 정복하다> 

서기56년에 동옥저를 정복하여 창해(동해)를 확보하였다. 

<요서에 백암성과 통도성 축조> 

서기57년 봄 1월에 백암성과 통도성(桶道城)을 축조하였다. 

백암성은 갈석산의 남쪽에 있으며, 당나라 때의 암주(岩州)이다. 

통도성은 고려진(高麗鎭)이라고 하는데, 북경(北京)의 안정문(安定門) 밖 60리 되는 곳에 있다. 

<갈사국의 투항> 

서기68년 신미년에 23세의 태조무열제가 갈사국을 침공하니, 8월에 갈사국의 도두왕이 고구려가 날로 강해짐을 보고 마침내 나라를 들어 항복하여, 3대 47년만에 나라가 망하였다. 

갈사국은 백두산의 동북쪽에 위치한 나라가 되는데, 지금의 두만강의 지류가 되는 갈사수를 중심으로 하던 나라가 되며, 고구려에 항복하여 두만강 유역의 혼춘(琿春)에 동부여로 봉해진다. 

<항복한 갈사국 도두왕을 동부여후로 봉하다> 

서기68년에 고구려는 항복한 도두왕을 우태(于台)라 부르도록 하고 저택을 하사하더니 혼춘(琿春)을 식읍으로 삼게 하여 동부여후(東夫餘侯)로 봉하였다. 혼춘은 백두산의 동북쪽의 두만강 유역에 위치하고 있다. 

<조나국 복속> 

서기72년에 관나부(灌那部) 패자 달가를 보내어 조나국을 쳐서 왕을 사로잡고 복속시켰다. 

관나부는 고구려의 남부(南部)가 된다. 연나부는 서부, 절노부는 북부, 계루부는 중부, 소노부는 동부이다. 

<주나국 복속> 

서기74년에 환나부 패자 설유를 보내어 주나국을 복속시켰다. 여기서 환나부는 관나부의 오기가 아닌가 한다. 

<고구려의 요동 정벌> 

서기88년 봄에 고구려가 요동(遼東)에 들어가 6현(縣)을 침공하였다. 

<요동 6현을 빼앗다> 

서기105년에 요동을 공격하여 6현을 빼앗았다. 얼마 안가 6현을 잃었다. 

<현도군을 정벌하다> 

서기111년에 고구려가 한(漢)나라 안제(安帝)에게 사신을 보내어 현도군을 내놓으라고 하였다. 

서기118년에 고구려가 현도군을 침공하여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수성의 현도와 요동 정벌> 

서기121년 봄에 한나라가 유주자사 풍환과 현도태수 요광과 요동태수 채풍 등이 군사를 내어 국경지방에서 고구려를 치니, 이에 태조무열제가 아들 수성(遂成)을 시켜 군사 2,000명을 거느리고 역광(逆光) 등에게 사신을 보내어 거짓 항복을 하였는데, 광 등은 이것을 믿고 받아들이자 수성은 지세가 험한 곳에 웅거하여 큰 군사를 막고 비밀리에 3,000명의 군사를 보내서 현도와 요동을 쳐서 성곽을 불사르고 군사 2,000명을 살상하였다. 

이에 한나라는 광양, 어양, 우북평, 탁군 등 속국의 군사 3,000명을 모아 함께 이를 구원하기 위하여 보냈으나, 이때 고구려 군사들은 이미 가버린 뒤였다. 

<고구려가 요대(遼隊:요수(遼隧))를 정벌하다> 

서기122년 여름에 다시 고구려가 요동과 선비(鮮卑)의 군사 8,000명을 내어 요수(遼隧:요대(遼隊))를 쳐서 관리와 사람들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자 한나라의 요동태수 채풍 등이 이를 추격했으나 신창(新昌) 땅에서 전사했는데, 이때 태수 아래 직속부하들이 몸으로 채풍을 막았으나 모두 칼에 맞아 죽었으며, 이 싸움에서 죽은 자가 백여명이었다. 

<고구려와 연나부 낙씨 부여의 전쟁> 

서기122년 가을에 고구려 태조무열제가 군사 수천을 이끌고 현도를 포위하였다. 이에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를 보내어 군사 2만여명을 거느리고 현도군의 군사와 힘을 합하여 고구려를 쳐서 500명의 머리를 베었다. 

이로써, 고구려가 서기22년에 연나부에 봉하였던 낙씨 부여는 고구려에서 독립하여 한(漢)나라에 동조한 것이 된다. 

<고구려의 요동 정벌> 

서기132년에 한나라 순제(順帝)가 현도군에 6부를 두었다. 이때 고구려가 신안(新安)을 넘어서서 다시 요동(遼東) 서안평(西安平)을 침공하고, 대방현(帶方縣)의 현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들을 잡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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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사무총장.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동안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1. 홍익인간(弘益人間) 천부(天符)의 역사는 마고성(麻姑城:파미르고원)의 마고(麻姑)시대인 서기전70378년 계해년(癸亥年)부터 시작되었음을 최초로 밝혔음. 
2. 역법(曆法)이 시작된 해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585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3. 황궁씨를 이은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다는 것임을 밝혔음. 
4.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무한조화순환역(無限造化循環易), 음양오행(陰陽五行), 태양태음성력(太陽太陰星曆), 단군조선의 정치행정 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배달나라 시대의 음양오행수리역(陰陽五行數理易)이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5.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히고,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으며,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에게 제(祭)를 올리는 권한을 가진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있었던 당요(唐堯)의 전란(戰亂)으로 인한 단군왕검(檀君王儉)의 동북 아사달로의 이동과정임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천자로 불리는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의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인 천자(天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우 치수기념 부루공덕 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여, 서기전2267년 이후 우(禹)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겨 남악(南嶽) 형산(衡山)에 세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추장(酋長)의 후손임을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최초 해독학자 허대동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 해독의 검증에 참여하여 첨수도(尖首刀),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상형 및 표음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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