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뿌리를 찾아서)/홍익인간 7만년 역사

[홍익인간 298] 고구려(高句麗) 연대기 7

양해천 2018. 1. 22. 13:12

[홍익인간 298] 고구려(高句麗) 연대기 7

2012년 04월 29일 (일) 07:00:29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19. 제19대 광개토경평안호태황(廣開土境平安好太皇:서기391년~서기412년) 

서기391년에 고국양제의 태자 담덕이 18세의 나이로 광명전(光明殿)에서 등극하였으며, 연호를 영락(永樂)이라 하였다. 여기서 영락은 연호이므로 왕호로 하여 영락태왕이라 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은 것이 된다. 

<어아가와 참성단 제천> 

군사들로 하여금 어아가(於阿歌)를 부르게 하고 사기를 돋우었다. 말을 타고 순수하여 마리산에 이르러 참성단에 올라 친히 삼신(三神)에게 제사지냈다. 여기서 어아가는 배달나라 시대부터 이어져 온 권선가(勸善歌)이며, 나라를 세운 조상들에게 감사드리는 노래이다. 특히 단군조선 제2대 부루 천왕 시대에 어아가가 많이 불려진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왜 격파> 

서기391년 신묘년(辛卯年)에 백제와 왜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자, 고구려 군사가 바다를 건너 왜를 격파하였다. 이해에 신라 내물 마립간의 왕자 실성을 볼모로 잡았다. 

<광개토호태황 친솔(親率) 수군의 백제 10성 점령> 

왜인은 백제의 보좌였는데, 백제가 먼저 왜와 밀통하여 왜로 하여금 신라의 경계를 계속해서 침범하게 사주하였다. 이에 서기392년에 광개토호태황은 몸소 수군을 이끌고 웅진, 임천, 와산, 괴구, 복사매, 우술산, 진을례, 노사구 등 10성을 공격하여 정복하고서, 도중에 속리산에서 이른 아침에 제천하고 돌아 왔다. 

<백제 관미성 함락> 

서기392년에 광개토호태황은 군사를 7부대로 나누어 20일동안 쉬지 않고 공격하여 관미성을 함락시켰다. 이때 백제의 진사왕이 죽고 조카인 아신왕이 즉위하였다. 

<거란 정벌> 

백제를 다시 공격할 때 거란이 침입하여 약탈하고 백성들을 잡아가므로 북쪽으로 향하니 거란군은 지레 겁을 먹고 달아나 백성들이 고구려로 되돌아 왔다. 

<절을 짓다> 

서기393년에 광개토호태황이 일반 백성들이 불교를 접할 수 있도록 평양에 9개의 절을 지었다. 

<백제 격파> 

백제가 서기393년부터 3년간 계속하여 고구려의 관미성, 수곡성, 패수를 공격하였으나 패하였다. 

서기394년에 백제의 침입을 수곡성에서 격퇴하였다. 

서기395년에 패수(浿水)에서 백제를 격파하고 8,000명을 전사시켰다. 

<백제 58개성 함락> 

서기396년에 백제의 58개성을 함락시켰다. 

<후연의 침공> 

서기399년에 후연의 왕 모용성이 신성과 남소성을 함락하였다. 

<신라구원 및 대마도의 삼가라 복속> 

서기400년 신라를 도와 왜를 격퇴하고, 대마도에 소재한 신라에 속한 좌호가라(佐護加羅), 고구려에 속한 인위가라(仁位加羅), 백제에 속한 계지가라(鷄知加羅)의 삼가라(三加羅)를 복속시켰다. 

<백제, 신라, 가락, 거란, 평랑, 임나, 이왜, 후연, 읍루 등 복속> 

이때 백제, 신라, 가락을 복속시켜 조공하도록 하였으며, 거란, 평량을 평정하여 굴복시키고, 대마도(對馬島:쯔시마)의 임나(任那)와 구주(九州:큐슈)의 안라(安羅)와 본주(本州:혼슈)의 이왜(伊倭)를 복속시켜 신하로 삼았다. 또, 후연을 격파하여 요동을 확보하였으며, 읍루를 정벌하였다. 

<후연 정벌> 

서기402년에 고구려는 빼앗긴 신성과 남소성을 되찾고 평주로 진격하니, 이에 놀란 평주자사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도망하였다. 

<백제, 왜의 연합군 격퇴> 

서기404년에 백제와 왜의 연합군을 격퇴하였다. 

<후연의 침공> 

서기405년에 후연의 모득이 요동성을 공격하였으나 고구려에 패하였다. 

후연은 거란을 공격하였으나 거란에 밀려 고구려 쪽으로 후퇴하다 고구려의 목저성을 공격하였으나 패하였다. 

<후연의 멸망> 

서기407년에 후연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국력을 소진하여 멸망하였다. 

<북연과 수호> 

서기408년에 북연(北燕)과 수호하였다. 북연의 왕 고운은 후연 모용보의 양아들로서 고구려 출신이었다. 

<6성 축조 및 평양민 이주> 

서기409년에 6성을 쌓고 평양 백성을 이주시켰다. 

<동부여 정벌> 

서기410년에 동부여의 64개성을 함락시켰다. 

<광개토호태황의 붕어> 

서기412년 10월에 39세로 붕하였다. 


20. 제20대 장수홍제호태열제(長壽弘濟好太烈帝:서기413년~서기491년) 

광개토호태황의 태자 거련이 20세로 즉위하였다. 

연호를 건흥(建興)이라 하였다. 인의로써 나라를 다스려 강역을 널리 넓혔다. 

이에 웅진강(熊津江:공주) 이북이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광개토경호태황비 건립> 

광개토경평안호태황비



서기414년 갑인년에 광개토경호태황릉을 취산릉(就山陵:산같이 만든 릉)으로 이장하고, 광개토호태황비를 건립하였다. 

<광개토경호태황비문> 
<광개토경평안호태황비> 

광개토경호태황비는 태황릉에서 동북쪽 200m되는 곳에 세웠다. 비석 매행마다 41자, 전부 1,775자이며 현재 1,590여 글자는 해독이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 매행마다 41자로 모두 44행이 되어 합1,804자에서 기사왈(其詞曰) 아래 2자를 빼고 모두 1,802자가 되는 것이 타당할 것인 바, 27자 정도가 차이가 나는 것이 된다. 

비문의 내용은 고구려 건국과, 호태황 일생의 업적, 묘를 지키는 제도와 관련법령으로 나누어져 있다. 여기서는 단락을 지어 풀이하고, 해독불가 또는 탈자 된 부분은 서기1895년경 계연수(桂延壽) 선생이 해독한 자료를 근거로 한 것이라 추정되는 단단학회(檀檀學會) 발행의 광개토경평안호태황비문을 대부분 참조하여 합 1,802자로 하여 문맥에 일맥상통하도록 보완하였는데, 단단학회 발행 비문에서 보완한 글자는 ( ?)로, 필자가 보완한 부분은 [ ?]로 표시하였다. 해독불능 글자를 표시한 광개토호태황비문의 예는 참조자료로서 뒤에 별도로 붙인다. 

1. 생각컨대, 옛날에 시조 추모왕께서 나라의 바탕을 여셨도다! 북부여에서 나오시어 천제(天帝)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여랑(河伯女郞)이시다.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25자>). 

추모왕(鄒牟王)은 고구려 시조 고주몽(高朱蒙) 성제(聖帝)를 가리킨다. 고구려는 서기전37년에 졸본(卒本)에서 건국되었다. 고주몽은 서기전79년 5월 5일생이며, 아버지는 북부여(北夫餘)의 옥저후(沃沮侯) 고모수(高慕漱)로 일명 불리지(弗離支)이고, 어머니는 하백녀 유화부인(柳花夫人)이다. 추모(鄒牟)는 주몽(朱蒙)과 같이 활 잘 쏘는 사람을 뜻하는 “튜모” 또는 “듀무”라는 소리를 적은 글자로서 이두식 표기가 된다. 고주몽의 아버지 고모수는 북부여 시조인 증조(曾祖) 해모수(解慕漱)의 성씨가 해씨(解氏)이므로 해모수이기도 하다. 그래서 고주몽의 아버지와 고조(高祖)가 모두 해모수(解慕漱)가 된다. 

고주몽의 아버지 고모수(해모수)는 서기전80년경 압록하에서 유화부인을 만나 혼인하였다가 처가에 남겨두고 북부여 조정(朝廷) 일을 보러 떠났던 것이며, 고주몽이 어릴 때 아버지를 잃어 만나지 못하였던 것이 되는데, 이에 어머니 유화부인이 약5세 정도이던 어린 고주몽을 데리고 북부여의 첫 수도였던 난빈(蘭濱)의 웅심산(熊心山)으로 갔다가 다시 가섭원(迦葉原:분릉) 즉 지금의 길림에 위치한 동부여(東夫餘)로 가서 해부루왕(解夫婁王)의 왕실에서 자라게 되었다. 해부루왕과 고주몽의 아버지 고모수(해모수)는 6촌형제가 된다. 

고주몽은 7세가 되자 스스로 활을 만들어 쏘니 백발백중이었다. 크면서 재능이 출중하여 동부여의 조정(朝廷)이 고주몽을 모두 경계하게 되었던 것이며, 이에 고주몽은 유화부인의 명을 받들어 서기전59년에 동부여를 떠나 졸본(卒本)으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졸본에 도착한지 1년이 지난 서기전58년에 고주몽이 졸본에서 북부여 고무서(高無胥) 천왕(天王)의 유언을 받들어 대통(大統)을 잇게 되었다. 그리하여 실제로 고주몽이 나라를 일으키기 시작한 때는 서기전58년이 되는 것이다. 고주몽이 북부여 말기에 수도이던 졸본에서 대통을 이었으므로, 고구려 이전의 졸본부여(卒本夫餘)라고도 불린다. 

북부여는 서기전239년 4월 8일에 시작되었는데, 단군조선의 고씨(高氏) 단군 천왕의 종실(宗室)이던 23세의 천왕랑(天王郞:천지화랑:국자랑) 해모수(解慕漱)가 군사를 일으켜 북부여 땅인 상춘(常春)의 웅심산(熊心山) 아래 난빈(蘭濱)에서 즉위하여 북부여 시조가 되었다. 

천왕랑 해모수가 서기전232년에 단군조선의 수도이던 장당경(藏唐京)으로 가서 오가(五加)들을 설득하여 오가공화정(五加公和政)을 철폐하고 추대되어 천왕(天王)으로 즉위하였다. 

천왕이 붕(崩)하면 천제(天帝)로 받들어지는데, 북부여 시조 해모수는 고주몽의 고조로서 천제가 되는 것이며, 이에 고주몽은 천제(天帝)의 대를 이은 아들 즉 후손으로서 천제자(天帝子)가 되는 것이다. 

여랑(女郞)은 여자 화랑(花郞)을 가리키며, 단군조선 시대에 미혼의 남자들만이 아니라 미혼의 여자들도 화랑(천지화랑:국자랑)에 속하여 여랑이라 불렸던 것이 되고, 유화가 하백(河伯)의 딸로서 차출되어 여랑으로 활동하였던 것이 된다. 하백(河伯)은 제후격에 해당하는 직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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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사무총장.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동안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1. 홍익인간(弘益人間) 천부(天符)의 역사는 마고성(麻姑城:파미르고원)의 마고(麻姑)시대인 서기전70378년 계해년(癸亥年)부터 시작되었음을 최초로 밝혔음. 
2. 역법(曆法)이 시작된 해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585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3. 황궁씨를 이은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다는 것임을 밝혔음. 
4.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무한조화순환역(無限造化循環易), 음양오행(陰陽五行), 태양태음성력(太陽太陰星曆), 단군조선의 정치행정 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배달나라 시대의 음양오행수리역(陰陽五行數理易)이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5.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히고,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으며,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에게 제(祭)를 올리는 권한을 가진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있었던 당요(唐堯)의 전란(戰亂)으로 인한 단군왕검(檀君王儉)의 동북 아사달로의 이동과정임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천자로 불리는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의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인 천자(天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우 치수기념 부루공덕 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여, 서기전2267년 이후 우(禹)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겨 남악(南嶽) 형산(衡山)에 세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추장(酋長)의 후손임을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최초 해독학자 허대동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 해독의 검증에 참여하여 첨수도(尖首刀),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상형 및 표음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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