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뿌리를 찾아서)/홍익인간 7만년 역사

[홍익인간 308] 고구려(高句麗) 연대기 17

양해천 2018. 1. 23. 11:49

[홍익인간 308] 고구려(高句麗) 연대기 17

2012년 05월 07일 (월) 19:09:57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제20대 장수홍제호태열제(長壽弘濟好太烈帝:서기413년~서기491년)]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다> 

서기427년에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다. 

여기 평양은 대동강 평양이 된다. 

<나제동맹> 

서기433년 장수제가 남하정책을 펴자 이에 백제의 비유왕과 신라의 눌지왕은 고구려를 막기 위하여 동맹을 맺었다. 

<북연의 도움 요청> 

서기435년 가을에 북위가 북연을 침입하자 북연의 왕 풍흥이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에 장수제는 장수 갈로와 맹광에게 4만여 군사를 주어 북연으로 가서 군사들에게 북연의 군복과 병기를 나누어 북위를 치게 하였다. 

이때 풍흥은 북위에 쫓겨 고구려의 보호를 받으며 요동에 머물렀는데 장수제는 풍흥의 시종을 빼앗고 태자를 인질로 삼았다. 이에 풍흥은 송나라에 도움을 요청하니 송나라 왕이 왕백구를 고구려에 보내어 풍흥을 내 달라 하였다. 

이에 장수제는 손수와 고구를 북풍으로 보내어 풍흥과 그 가족을 죽였다. 그러자, 왕백구가 7천명 군사로 손수를 죽이고 고구를 체포하였다. 장수제는 왕백구를 체포하여 송으로 보내어 처벌하도록 하였다. 송나라 왕은 왕백구를 감옥에 가두었다. 

<신라를 침공하다> 

서기454년에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공하니 신라와 백제의 연합군이 대항하여 한동안 공략을 중지하였다. 

<북위의 혼인 제의> 

서기466년에 북위의 문명태후가 장수제에게 왕실혼인을 맺자 청하여 북위에서 폐백을 보내왔으나 장수제가 북위의 속셈을 알고 혼인을 파하였다. 이에 북위 왕이 사신을 보내와 재차 혼인을 요구하였으나 이때 북위 왕이 죽어 흐지부지 되었다. 

<신라를 침공하다> 

서기468년에 장수제가 말갈병 1만군사를 동원하여 신라의 실직주성을 빼앗았다. 이에 백제 개로왕은 고구려 남쪽 변경을 침공하고 북위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백제 정벌> 

서기475년에 장수제가 3만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전사시키고 남녀 포로 8,000명을 잡아왔다. 

<중원 고구려비 건립> 

서기475년에 중원 고구려비를 세웠다. 

<신라, 말갈 정벌> 

서기480년에 신라를 정벌하여 죽령 이북을 탈취하였다. 또, 말갈을 정벌하였다. 

이에 동진, 송, 북위와 통교하고 북연(北燕), 실위(室韋), 거란(契丹)을 복속시켰으며, 신라매금(新羅寐錦)과 백제어하라(百濟於瑕羅)와 남쪽의 평양에서 만나 납공과 수비군사의 수를 정하였다. 

여기서 신라매금은 신라의 왕을 가리키며, 백제어하라는 백제왕을 가리킨다. 매금(寐錦)은 니사금(尼斯今)과 같은 말로서 임금(壬儉, 王)을 나타내는 글자가 되고, 어하라(於瑕羅)는 어른(長)을 나타내는 글자가 된다. 백제역사상 최초의 어하라는 서기전31년에 고주몽 성제로부터 어하라로 봉해진 소서노(召西弩)이다. 


21. 제21대 문자호태열제(文咨好太烈帝:서기492년~서기519년) 

장수제의 손자 나운이 즉위하였다. 

서기492년에 즉위하여 연호를 명치(明治)라 하였다. 

<부여를 복속시키다 - 연나부 낙씨 부여의 멸망> 

서기494년에 연나부(椽那部) 낙씨(絡氏)의 부여를 귀속시켰다. 서기22년에 동부여 대소왕의 종제(從弟)가 봉해진 고구려 연나부 낙씨(絡氏)의 부여는 뒤에 차츰 자립하여 개원(開原) 서북으로부터 옮겨가 백랑곡(白狼谷)에 이르니 바로 연(燕)나라의 땅에 가까운 곳이었다. 서기120년경에 고구려에서 독립하여 한나라에 동조함으로써 고구려와 한나라 사이에서 독립을 유지하였던 것이 된다. 

서기494년 즉, 고구려 문자열제(文咨烈帝)의 명치(明治) 갑술년(甲戌年)에 이르러 나라를 들어 고구려의 연나부에 편입되니, 낙씨는 마침내 제사조차 끊겼다. 

<신라를 침공하다> 

서기496년에 신라의 우산성을 함락시켰다. 

<제, 노, 오, 월의 땅을 취하다> 

서기501년 11월에 이르러 월주(越州)를 공격하여 취하고 송강(松江), 회계(會稽), 오월(吳越), 좌월(左越), 산월(山越), 천주(泉州)라 했다. 

서기502년에 신라의 백성을 천주(泉州)로 옮기고 중심백성으로 삼았으며, 제(齊), 노(魯), 오(吳), 월(越)의 땅이 고구려에 속하였다. 이에 이르러 나라의 강토는 더욱 커졌다. 

여기서 천주(泉州)는 월주(越州)에 속한 땅이 되어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남쪽과 서쪽이 되며, 제(齊)의 땅은 산동지역이 되며, 노(魯)의 땅은 태산(泰山) 서쪽의 땅이 되고, 오(吳)의 땅은 산동지역 남쪽 땅인 강소성(江蘇省)과 절강성에 걸치는 지역이 된다. 

<백제 동성왕을 폐하고, 백제군을 폐지하다> 

서기502년에 백제가 조공을 하지 않아 동성왕을 폐하고, 요서군(遼西郡)과 진평군(晋平郡) 등 백제군(百濟郡)을 폐지하였다. 

<백제를 침공하다> 

서기512년에 백제의 가불, 원산성을 함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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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사무총장.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동안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1. 홍익인간(弘益人間) 천부(天符)의 역사는 마고성(麻姑城:파미르고원)의 마고(麻姑)시대인 서기전70378년 계해년(癸亥年)부터 시작되었음을 최초로 밝혔음. 
2. 역법(曆法)이 시작된 해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585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3. 황궁씨를 이은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다는 것임을 밝혔음. 
4.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무한조화순환역(無限造化循環易), 음양오행(陰陽五行), 태양태음성력(太陽太陰星曆), 단군조선의 정치행정 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배달나라 시대의 음양오행수리역(陰陽五行數理易)이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5.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히고,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으며,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에게 제(祭)를 올리는 권한을 가진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있었던 당요(唐堯)의 전란(戰亂)으로 인한 단군왕검(檀君王儉)의 동북 아사달로의 이동과정임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천자로 불리는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의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인 천자(天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우 치수기념 부루공덕 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여, 서기전2267년 이후 우(禹)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겨 남악(南嶽) 형산(衡山)에 세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추장(酋長)의 후손임을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최초 해독학자 허대동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 해독의 검증에 참여하여 첨수도(尖首刀),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상형 및 표음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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