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뿌리를 찾아서)/홍익인간 7만년 역사

[홍익인간 311] 고구려(高句麗) 연대기 20

양해천 2018. 1. 23. 11:51

[홍익인간 311] 고구려(高句麗) 연대기 20

2012년 05월 10일 (목) 07:52:52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27. 제27대 영류제(榮留帝:서기618년~서기642년) 

서기618년에 영양제의 아들이 없어 이복동생 좌장군 고성(高成:건무)이 즉위하였다. 건무는 연태조의 북벌정책을 막았던 인물이다. 

<포로를 교환하다> 

서기622년에 당나라 이연의 제의로 수나라 때의 전쟁포로를 서로 교환하였다. 

<도교 수입> 

서기624년에 당나라로부터 도교를 수입하였다. 

<낭비성을 잃다> 

서기629년에 신라에게 낭비성을 잃었다. 

<천리장성 축조> 

서기631년부터 부여성에서 남해부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았다<~647). 

<신라의 칠중성을 공격하자> 

서기638년에 신라의 칠중성을 공격하였다. 

<당나라가 고구려 태자를 입조시키다> 

서기640년에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 태자를 입조시키고 고구려에 진대덕을 사신으로 보내어 정탐하도록 하였다. 

<연개소문이 영류제를 폐하다> 

서기642년에 서부대인 연개소문이 도교를 파할 것을 주장하고, 장성 축조 중단 요청하였으나 영류제가 따르지 않고 연개소문의 병사를 빼앗고는 천리장성 일을 감독시키더니 은밀하게 연개소문을 죽이고자 하였는데, 이에 연개소문이 먼저 알아차리고 영류제를 폐위하고 영류제의 조카 고장(高藏)을 옹립하였다. 



28. 제28대 보장제(寶藏帝:서기642년~서기668년) 

서기642년에 영류제의 조카 고장(高藏)이 즉위하여 연호를 개화(開化)라 하였다. 

<신라가 당나라에 원병을 요청하다> 

서기643년에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 때문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원병을 요청하였다. 

<연개소문> 

연개소문은 보장제의 즉위로 뜻을 얻어 만법을 시행하니, 대중을 위한 길은 성기, 자유, 개물, 평등으로 하고, 삼홀을 전으로 하고, 조의에 율이 있게 하고, 힘을 국방에 쏟아 당나라에 대비하는 데 매우 완전하였다. 

서기643년경 연개소문은 백제의 상좌평 성충(成忠)을 만나 함께 의(義)를 세웠다. 또, 신라의 김춘추를 청하여 자기의 집에 머물게 하면서 설득하기를, “당나라 사람들은 패역하기가 짐승에 가까우니, 청컨대 우리나 그대들은 반드시 사사로운 원수를 잊고 지금부터 삼국은 백성의 뜻을 모으고 힘을 합쳐 곧바로 당나라 서울 장안을 쳐들어가 도륙한다면 당나라 괴수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니, 전승의 뒤에 옛 영토에 따라서 연정(聯政)을 실시하고 인의로써 함께 다스려 약속하여 서로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영구준수의 계획으로 함이 어떻겠소?”라고 하며 이를 재삼 권하였으나, 김춘추는 끝내 듣지 않아 실패하였다. 

<당나라의 1차 침입> 

서기645년 당나라 이세민(李世民)이 10만여 군사로 제1차 침입하였는데, 이때 이세적(李世勣)은 6만 윤군으로 요동을 침입하였고, 장량은 수군 4만으로 전함 500척으로 평양을 향했다. 이세민의 군사는 황하북류 좌안의 요택(遼澤)에 이르렀는데 진흙길 200여리에 빠졌다. 

당나라군은 개모성, 비사성 등을 함락하고 요동성을 향하였다. 부교를 설치하여 요수를 건너 12일만에 요동성을 함락하였다. 이때 고구려는 1만여 군사가 목숨을 잃었고 양곡 50만섬이 불에 탔다. 


이세민은 이세적과 합쳐 백암성의 서남쪽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이세민은 안시성에 이르러 먼저 당산(唐山)으로부터 병사들을 진격시켜 공격하도록 하였다. 고구려의 북부 욕살 고연수(高延壽)와 남부 욕살 고혜진(高惠眞)은 관병과 말갈병병 15만을 이끌고 똑바로 전진하여 안시성에 연결되는 진지를 쌓고 병사를 종횡무진으로 풀어 당나라 군대를 격파하였다. 

이때 고연수는 고정의의 말을 듣지 않고 안시성에서 떨어진 곳에 진을 치고 있다가 당나라 태종이 돌궐 기병 1천여명으로 고연수의 군사를 유인하였는데, 이를 모르는 고연수가 안시성 동남쪽 8리까지 쫓아가 진을 쳤다. 이에 당나라 태종이 고연수에 사신을 보내어 안심시키니 고연수가 이 말을 믿고 대비하지 않고 있다가 장군의 급습으로 3만여 군사를 잃고 고연수와 고혜진은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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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사무총장.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동안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1. 홍익인간(弘益人間) 천부(天符)의 역사는 마고성(麻姑城:파미르고원)의 마고(麻姑)시대인 서기전70378년 계해년(癸亥年)부터 시작되었음을 최초로 밝혔음. 
2. 역법(曆法)이 시작된 해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585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3. 황궁씨를 이은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다는 것임을 밝혔음. 
4.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무한조화순환역(無限造化循環易), 음양오행(陰陽五行), 태양태음성력(太陽太陰星曆), 단군조선의 정치행정 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배달나라 시대의 음양오행수리역(陰陽五行數理易)이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5.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히고,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으며,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에게 제(祭)를 올리는 권한을 가진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있었던 당요(唐堯)의 전란(戰亂)으로 인한 단군왕검(檀君王儉)의 동북 아사달로의 이동과정임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천자로 불리는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의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인 천자(天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우 치수기념 부루공덕 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여, 서기전2267년 이후 우(禹)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겨 남악(南嶽) 형산(衡山)에 세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추장(酋長)의 후손임을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최초 해독학자 허대동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 해독의 검증에 참여하여 첨수도(尖首刀),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상형 및 표음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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