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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 324] 사국(四國) 시대 백제(百濟) 연대기 6

양해천 2018. 1. 23. 13:00

[홍익인간 324] 사국(四國) 시대 백제(百濟) 연대기 6

2012년 05월 22일 (화) 07:45:02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31. 제31대 의자왕(641~660) 

무왕의 태자가 즉위하였다. 태자 시절에 해동증자라 불렸다. 

사비궁을 중수하였다. 흥왕사를 창건하였다. 

서기642년에 의자왕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하여 미후성 등 40여개 성을 빼앗았다. 8월에 의자왕이 윤충을 불러 신라의 대야성을 치게 하니, 대야성 성주 김품석에게 아내를 빼앗긴 검일이 윤충을 찾아와 모의하여 검일이 대야성의 군량을 불테우니, 대야성이 항복하였는데, 윤충은 김품석과 그 가족을 모두 죽이고 머리를 베어 사비성으로 보냈다. 남녀 1천여명을 사로잡았다. 

이에 신라의 김춘추가 고구려의 연개소문을 만나러 간다는 소식을 듣고 성충이 연개소문에게 편지를 보냈다. 연개소문은 성충의 글을 보고 김춘추에게 조건을 걸어 설득하였으나 듣지 않아 김춘추를 감금하였고 김춘추는 탈출하였다. 

서기643년 1월에 백제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고 고구려와 화친하였다. 11월에 백제가 신라의 당항성을 공격하였으나 신라의 선덕여왕이 당나라 태종에게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의자왕은 군사를 철수시키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니 당 태종은 사농 승상 이현장을 보내어 신라를 치지 말라는 국서를 백제에 전하였다. 

서기645년에 백제는 당나라가 군사를 일으킨다는 소식을 접하고 신라를 공격하여 7개성을 빼앗았다. 당나라가 1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패하였다. 

서기647년에 신라의 선덕여왕을 이어 진덕여왕이 즉위하였다. 

서기648년에 의자왕은 의직을 보내어 신라의 서쪽 변경의 요거성 등 10여개 성을 
빼앗았다. 당나라 태종이 죽고 고종이 즉위하였다. 

신라의 김춘추가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 돌아왔으며 이에 진덕영왕이 5언시 태평송을 지어 바쳤다. 

당고종은 백제에 국서를 보내어 신라로부터 빼앗은 성을 돌려줘라 하였다. 

서기654년에 신라의 김춘추가 즉위하였다. 

서기655년에 의자왕은 당고종의 압력을 무시하고 고구려와 말갈과 합공으로 신라를 공격하여 30여개 성을 빼앗았다. 

서기656년에 의자왕은 향락에 빠져 있었는데, 성충이 간하자 성충을 가두었다. 

서기657년 1월에 의자왕은 서자 41명에게 좌평 벼슬과 식읍을 주었다. 

서기659년 2월부터 나라 안에 변괴가 자주 일어났다. 여우떼가 궁안으로 들어와 여우 한 마리가 상좌평의 책상에 올라 앉았으며, 5월에는 수도 서남쪽의 사비하에서 길이 세길이나 되는 죽은 물고기가 발견되고, 8월에는 키가 18척이 되는 여인의 시체가 생초진에 떠내려왔다. 9월에는 궁중의 느티나무가 울었다. 

서기660년 2월에는 왕성의 우물물과 사비하 물이 핏빛으로 변하였다. 궁의 땅속을 파니 등에 백제는 보름달과 같고 신라는 초승달과 같다라는 글자가 새겨진 거북이 나왔다. 이에 무당을 불러 해석하게 하고는 의자왕이 무당을 죽였다. 

서기660년 여름에 나당연합군이 침입하였다. 당나라의 소정방과 김인문의 13만의 군사가 인천 앞바다에 있는 덕물도(덕적도)를 거쳐 백강에 침입하고, 신라의 김유신의 5만 군사가 탄현을 넘어 황산벌을 침입하였다. 이에 의자왕이 귀양가 있는 좌평 흥수에게 사람을 보내어 방책을 물으니 당군은 백강을 넘지 못하게 하고 신라는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도록 일러 주었다. 이때 신하들이 의자왕에게 당군을 백강을 넘게 하고 신라는 탄현을 넘게 한 후 공격하여 물리치면 된다고 간하여 이에 따르게 되었다. 그러나, 백제는 당군과 신라군에게 모두 패하였다. 

<계백의 전사> 
이때 달솔 계백이 자기 손으로 처자를 모두 죽인 후, 결사대 5천을 이끌고 황산벌로 나아가 진을 쳤다. 이리하여 황산벌에서 김유신의 신라군과 치열한 전투를 하였다. 신라는 4전4패였다.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이 아들 반굴을 불러 백제를 치게 하였고 반굴은 전사하였다. 이에 품일 장군이 아들 관창을 불러 백제를 치게 하였고 관창은 백제군에게 사로 잡혔다. 돌려보내진 관창이 다시 백제를 쳤으나 사로잡혀 시체가 되어 말에 태워져 돌아왔다. 이에 신라군이 분노하였고, 수적으로 우세하여 용기백배하여 백제군을 치니 백제군이 무너졌다. 결국 계백도 전사하고 황산벌 전투는 신라의 승리로 끝났다. 

백제의 좌평 각가가 소정방을 찾아가 항복의 뜻을 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소정방은 신라군과 합류하여 사비성을 포위하였다. 

상좌평이 소정방을 찾았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왕자가 몸소 좌평 6명을 데리고 소정방을 찾아 갔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에 의자왕은 태자 효와 궁녀들을 거느리고 궁궐을 빠져나가 부소산으로 도망하였다. 

둘째 왕자 태가 즉위하였다. 이에 태자 효의 아들인 문사가 왕자 융과 함께 백성을 거느리고 성밖으로 나가 신라군에 항복하였다. 

성을 지키던 왕자 태는 당군이 성안으로 들어오자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의자왕은 부소산에서 웅진성으로 도피하였다. 

<백제의 멸망> 
결국 의자왕은 웅진성에서 태자 효와 함께 성에서 나와 항복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서기전18년부터 서기660년까지 678년의 역사로 마감하였다. 서기전42년의 소서노(召西弩)의 어하라국(於瑕羅國)으로부터 따지면 합33대 720년이다. 

소정방은 의자왕과 왕자들, 대신, 자수 등 88명과 백성 1만2천여명을 포로로 잡아 당나라로 끌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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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가 백제 땅에 웅진, 마한, 동명, 금련, 덕안의 5도독부를 설치하였다. 

서기600년부터 서기603년까지 백제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무왕의 조카 복신이 승병장 도침과 함께 주류성(한산)에서 서기631년에 왜에 파견되었다 급히 귀국한 왕자 풍(豊)을 옹립하여 부흥운동을 하였다. 복신이 군사를 이끌고 유인원이 지키고 있던 도성으로 쳐들어갔다. 이때 웅진 도독 왕문도가 죽자 유인원이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당나라는 유인궤를 보냈다. 복신과 도침은 웅진강 어귀에서 두개의 목책을 세우고 막았으나 이때 신라가 합세하여 전세가 불리해지자 목책 안으로 후퇴하여 싸웠다. 복신과 도침은 도성의 포위를 풀고 임존성으로 퇴각하였다. 이후 복신과 도침의 승리소식을 들은 백성들이 모여들었다. 이에 도침이 유인궤에게 사자를 보냈고 유인궤도 사자를 보냈다. 이후 유인궤는 유인원의 군사와 합치고, 당고종이 신라 무열왕에게 유인궤를 도와주라 하자 무열왕은 김흠 장군을 보냈다. 이때 복신이 고사에서 김흠순의 신라군을 격파하자 겁에 질린 신라군이 감히 나오지 못하였고, 당나라군은 식량줄이 끊겼다. 

이후 내부갈등으로 복신이 도침을 살해하였다. 

풍왕은 왜에 구원병을 요청해 놓았다. 

복신이 유인원에게 사자를 보냈다. 

유인원이 유인궤와 합공으로 백제부흥군을 공격하였다. 이에 복신과 백제군은 진현성으로 도피하였다. 유인궤는 신라군과 합공으로 한밤중에 진현성을 기습하여 백제군 800여명을 죽였다. 

복신이 풍왕을 죽이기 위하여 토굴방에 누워 꾀병을 앓았다. 

서기663년 6월에 풍왕이 복신의 토굴로 가서 복신을 죽였다. 

풍왕은 왜에 사신을 보내어 구원병을 독촉하여, 왜가 구원병 27,000여명과 전함 1,000여 척을 보내왔다. 

이에 당나라는 백제부흥군을 분열시키기 위하여 왕자 융을 백제왕으로 삼아 손인사와 함께 파견하였다. 이에 민심이 흔들렸다. 이때 유인궤는 주류성을 치기로 하였고, 이에 손인사와 유인원이 이끄는 당군과 문무왕의 신라군이 주류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유인궤는 부여융과 함께 전함을 거느리고 웅진강에서 백강으로 진격하다 왜군을 만났다. 당군은 4전4승하여 왜 전선 400여척을 불태웠다. 이에 풍왕이 사라졌다. 백제의 모든 성이 함락당한 뒤에도 지수신이 홀로 임존성을 지켰는데, 흑치상지가 당군에 투항한 후, 흑치상지에 의하여 임존성이 무너져, 백제의 부흥운동은 완전히 끝났다. 

풍왕(豊王)은 이때 왜(倭)로 돌아갔던 것이며, 서기672년에 형 부여용(夫餘勇)인 천지왕(天智王:서기662년~서기671년)을 이어 천무왕(天武王:서기672년~서기686년)이 되었던 것이며, 서기672년에 국호 왜(倭)를 고치어 일본(日本)이라 한 것이 된다. 백제 제30대 의자왕은 효, 태, 융(隆), 용(勇), 풍(豊) 등의 많은 왕자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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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사무총장.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동안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1. 홍익인간(弘益人間) 천부(天符)의 역사는 마고성(麻姑城:파미르고원)의 마고(麻姑)시대인 서기전70378년 계해년(癸亥年)부터 시작되었음을 최초로 밝혔음. 
2. 역법(曆法)이 시작된 해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585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3. 황궁씨를 이은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다는 것임을 밝혔음. 
4.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무한조화순환역(無限造化循環易), 음양오행(陰陽五行), 태양태음성력(太陽太陰星曆), 단군조선의 정치행정 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배달나라 시대의 음양오행수리역(陰陽五行數理易)이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5.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히고,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으며,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에게 제(祭)를 올리는 권한을 가진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있었던 당요(唐堯)의 전란(戰亂)으로 인한 단군왕검(檀君王儉)의 동북 아사달로의 이동과정임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천자로 불리는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의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인 천자(天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우 치수기념 부루공덕 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여, 서기전2267년 이후 우(禹)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겨 남악(南嶽) 형산(衡山)에 세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추장(酋長)의 후손임을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최초 해독학자 허대동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 해독의 검증에 참여하여 첨수도(尖首刀),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상형 및 표음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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