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 326] 고구려 연나부 낙씨 부여(夫餘) 연대기
2012년 05월 24일 (목) 06:41:18 | 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
[고구려 연나부에 봉해진 낙씨]
서기22년 동부여왕 대소의 종제(從弟:사촌)가 만여명의 백성을 데리고 고구려에 항복하니, 고구려 대무신열제(大武神烈帝)는 그를 왕으로 봉하고 연나부(椽那部)에 안치하였다. 그의 등에 띠와 같은 무늬가 있어 낙씨(絡氏) 성을 하사하였다.
대무신열제가 제후인 왕으로 봉한 것이 된다. 이 연나부 낙씨의 나라가 동부여의 후예이며, 서기22년에 고구려의 제후국으로 출발하여 서기494년에 망한 부여로서, 고구려의 서부(西部)에 위치하여 후한(後漢)과 진(晋), 선비(鮮卑) 등 북중국(北中國) 사이에 존재하였던 부여국(夫餘國)이다.
[부여가 후한(後漢)과 우호를 맺다]
서기49년에 부여왕(夫餘王)이 사신을 보내어 후한 광무제에게 조공하였고 광무제는 이에 후하게 답례를 하였다.
이때 부여는 독자적으로 후한과 교류하여 독립을 시도한 것이 된다. 여기 부여는 고구려의 서부인 연나부에 봉해진 낙씨의 부여가 된다. 낙씨 부여는 서기22년부터 서기494년 사이에 고구려의 서쪽에 등장하는 부여로서 일명 동부여의 후예이므로 동부여(東夫餘)라고도 불릴 수 있다.
<부여가 후한을 침공하다>
서기111년에 부여왕이 처음으로 보병 6~7천명을 거느리고 한나라의 낙랑군을 침략하여 관리들과 백성을 살상시켰다.
이때 부여는 후한과 적대행위를 한 것이 된다. 즉 이때 부여는 고구려와 후한과의 사이에서 독립을 유지하려 나름대로 외교전을 펼친 것이 되는데, 고구려의 영향력이 더 컸던 것으로 된다.
[부여의 독립]
서기120년경 개원(開原)의 서북으로부터 옮겨가 백랑곡(白狼谷)에 이르니 연나라 땅 가까운 곳이었다.
서기120년에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어 후한(後漢) 안제(安帝)에게 조공하니 안제는 위구태에게 인수(印綬)와 금백(金帛)을 내렸다.
이때부터 부여는 후한과 친교하여 고구려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것으로 된다.
[부여왕의 장례를 위해 준비한 한(漢)나라의 옥갑]
이때경부터 한(漢)나라는 부여왕이 죽으면 그 장사에 옥갑(玉匣)을 쓰도록 하였는데, 언제나 미리 이것을 현도군에 보내 두었다가 왕이 죽으면 갖다 쓰도록 하였다. 서기204년 이후 공손강(公孫康)의 아들 공손연(公孫淵)이 사마의(司馬懿)에게 죽임을 당하였을 때도 현도군의 창고에는 옥갑 한 벌이 남아 있었고, 서기265년에 시작된 진(晋)나라 때 부여의 창고에도 옥벽(玉璧)과 규찬(珪瓚) 등이 여러 대에 걸쳐 장사에 쓸 물건이 남아 있어서, 이것을 대를 전해 가면서 보배로 삼았다.
[부여왕이 후한(後漢)을 방문하다]
서기136년에 부여왕 위구태(서기130년경~서기190년경)가 한나라 순제를 조회하자 순제는 황문고(黃門鼓)를 만들어 피리 불고 놀게 하고서 보냈다.
서기149년경 부여왕 위구태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부여의 현도군 침공]
서기150년경 부여의 왕부태(王夫台)가 군사 2만여명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침입하자 현도태수 공손역(公孫域)이 쳐서 깨치고 천여명을 베었다. 이때 부여는 다시 후한과 적대행위를 한 것이 된다.
[부여의 후한(後漢)에 대한 조공 재개]
서기169년경 부여가 후한(後漢)에 다시 조공하였다.
[부여왕 위구태가 한나라 왕녀를 아내로 삼다]
서기190년경 부여왕 위구태(서기130년경~서기190년경)가 후한의 왕녀로써 아내로 삼았다. 이때는 고구려와 선비가 강성하여 이들 두 나라 틈에 끼어 있다고 하여 부여왕 위구태가 후한 헌제(獻帝)에게 요구하였던 것이 될 것이다.
[부여왕 간위거의 즉위]
위구태가 죽고 간위거(簡位居:서기190년경~서기250년경)가 즉위하였다. 간위거는 계부(季父) 우가(牛加)의 아들 위거(位居)를 견사(犬使)로 삼았다.
[부여왕 간위거가 우가(牛加)의 부자를 죽이다]
서기246년(魏 政始)에 위(魏)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칠 때, 현도태수 왕흔(王欣)을 부여에 보내어 부여왕을 뵙게 하니, 이에 간위거는 견가(犬加)를 보내어 왕흔을 맞게 하고 군량을 공급하여 주었다. 이때, 우가(牛加)가 딴 마음이 있어 이를 안 위거왕은 계부의 부자를 죽였다.
[부여왕 마여의 즉위]
간위거가 죽자 모든 가(加)들이 간위거의 첩의 아들 마여(麻余:서기250년경~서기300년경)를 즉위시켰다.
[부여왕 의려의 즉위]
마여가 죽자 그의 아들 의려(依慮:서기300년경~서기342년)를 세워 왕으로 삼았는데 겨우 6세였다.
[의려왕이 선비를 피하여 왜의 왕이 되다?]
서기342년(晋 제7대 成帝:太康 6년)에 선비족(前燕)의 모용외(慕容廆)가 부여를 치니, 부여왕 의려(依慮)는 은밀하게 아들 의라(依羅)에게 나라를 맡기고, 백랑산(白狼山)을 넘어 밤에 해구(海口)를 건너니 따르는 자가 수천이었으며 이에 바다를 건너 왜를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 하고, 그의 자제(子弟)들은 옥저로 도망하여 살았다 한다.
[의라왕의 부여 회복]
서기343년경 의려의 아들 의라가 진(晋)나라의 도움으로 모용외를 물리치고 나라를 회복하였다.
[부여의 멸망]
서기494년 갑술년에 이르러 나라를 들어 고구려의 연나부에 편입하니 낙씨는 마침내 제사가 473년만에 끊겼다. 이때 고구려의 임금은 문자제(文咨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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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사무총장.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동안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1. 홍익인간(弘益人間) 천부(天符)의 역사는 마고성(麻姑城:파미르고원)의 마고(麻姑)시대인 서기전70378년 계해년(癸亥年)부터 시작되었음을 최초로 밝혔음.
2. 역법(曆法)이 시작된 해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585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3. 황궁씨를 이은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다는 것임을 밝혔음.
4.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무한조화순환역(無限造化循環易), 음양오행(陰陽五行), 태양태음성력(太陽太陰星曆), 단군조선의 정치행정 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배달나라 시대의 음양오행수리역(陰陽五行數理易)이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5.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히고,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으며,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에게 제(祭)를 올리는 권한을 가진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있었던 당요(唐堯)의 전란(戰亂)으로 인한 단군왕검(檀君王儉)의 동북 아사달로의 이동과정임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천자로 불리는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의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인 천자(天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우 치수기념 부루공덕 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여, 서기전2267년 이후 우(禹)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겨 남악(南嶽) 형산(衡山)에 세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추장(酋長)의 후손임을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최초 해독학자 허대동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 해독의 검증에 참여하여 첨수도(尖首刀),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상형 및 표음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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