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뿌리를 찾아서)/부도지(符都誌)

징심록추기(澄心錄追記) 제7장(第七章) 제9절 고려 태조 왕건이 부도(符都)을 일을 상세히 묻다

양해천 2018. 1. 26. 14:27

[원문] 

第九節 

時 王子弓裔 始聞立國之本 慷慨懷復疆之志 率軍直向朔北 
시 왕자궁예 시문입국지본 강개회복강지지 솔군직향삭북 
至於鐵圓而屯 使副將王建 說高句麗遺民 彼等 願再建故國 故 弓裔許之 乃稱後高句麗 
지어철원이둔 사부장왕건 세고구려유민 피등 원재건고국 고 궁예허지 내칭후고구려 
十年之間 弓裔遂驕 改稱泰封國 忘失本志 
십년지간 궁예수교 개칭태봉국 망실본지 
人心 歸於王建故 王建遂爲王 稱高麗移都於松嶽 宣布復疆之業 
인심 귀어왕건고 왕건수위왕 칭고려이도어송악 선포복강지업 
於是 新羅已衰 又不能拒復疆之大義 敬順王遂讓國 
어시 신라이쇠 우불능거복강지대의 경순왕수양국 
王建太祖遣使於堤上公宗嗣之家 詳審符都之事 
왕건태조견사어제상공종사지가 상심부도지사 
徵其次家之裔睡軒先生父子 皆辭而不就云 
징기차가지예수헌선생부자 개사이불취운 


[해설] 

제9절 

때에 왕자 궁예1)가 처음으로 입국의 근본을 듣고 원통해 하고 슬퍼하였다. 
강토회복의 뜻을 품고 군사를 이끌고 삭북(朔北)2)으로 곧장 향하다가 
철원에 이르러 주둔하고, 부장 왕건으로 하여금 고구려 유민들을 설득하게 하니, 
저들이 고국의 재건을 원하므로 궁예가 그를 허락하고 곧 후고구려(後高句麗)라 칭하였다. 

10년 사이에 궁예가 마침내 교만하여져서 태봉국이라 개칭하고 본뜻을 잃었다. 

인심이 왕건에게 돌아가므로, 
왕건이 마침내 왕이 되어 고려라 칭하고, 
송악으로 도읍지를 옮겨 강토를 회복하는 일을 선포하였다.(開封) 

이 때에 신라는 이미 쇠하고 또 강토 회복의 대의를 막을 수가 없으므로, 
경순왕(敬順王)이 마침내 나라를 내놓았다. 

왕건 태조가 제상공(堤上公) 종가(宗家)에 사신을 파견하여 
부도(符都)의 일을 상세하게 묻고 
그 차가(次家)의 후예 수헌3) 선생 부자를 불렀으나 
다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고 하였다. 

1) 궁예 : ?~918. 태봉궁의 임금. 승려로서 이름은 선종(善宗) 
신라 제47대 헌안왕 또는 경문왕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한단고기에 의하면 궁예의 선조는 평양사람(石門)으로 본래 보덕왕 안승의 먼 후예이며, 
그의 아버지는 강직하게 술가(術家)의 말을 따랐는데 
어머니의 성을 따서 궁씨라고 했다고 한다. 

2) 삭북 : 북방 

3) 수헌 : 904~?. 이름은 빈(濱)이며 좌복사술홍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