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뿌리를 찾아서)/홍익인간 7만년 역사 367

[홍익인간 282] 북부여(北夫餘) 연대기 7

[홍익인간 282] 북부여(北夫餘) 연대기 72012년 04월 13일 (금) 08:26:52천산(天山) sppopsj@yahoo.co.kr8. 북부여(北夫餘) 제8대 고주몽(高朱蒙) 천왕(天王)(서기전57년~서기전37년) [졸본부여 단군 고주몽과 신라시조 거서간 박혁거세] 서기전57년, 갑자년(甲子年)에 고주몽이 북부여의 졸본에서 고무서 천왕의 대를 이어 즉위하였다. 이때 고주몽이 23세였다. 이리하여 고주몽 또한 단군(檀君)이라 한다. 이해에 마한 땅 동쪽에 자리잡은 진한(辰韓)에서 박혁거세(朴赫居世)가 6부의 추대를 받아 거서간(居西干)이 되었는데 이때 박혁거세는 13세였다. 즉위연도로 따지면 고주몽이 북부여 단군이 된 때와 박혁거세가 신라 시조가 된 때가 같다. 다만, 단군은 천왕(天王)으로서 제후..

[홍익인간 281] 북부여(北夫餘) 연대기 6

[홍익인간 281] 북부여(北夫餘) 연대기 62012년 04월 12일 (목) 07:58:51천산(天山) sppopsj@yahoo.co.kr6. 북부여(北夫餘) 제6대 고두막(高豆莫) 천왕(天王)(서기전86년~서기전60년) [동명왕 고두막한의 천왕 즉위와 동부여왕 해부루] 서기전86년 을미년(乙未年)에 고두막 천왕이 즉위하였다. 북부여가 성읍(城邑)을 들어 항복하였는데, 여러 차례 보전하고자 애원하므로 고두막(高豆莫) 천왕께서 이를 듣고 해부루(解夫婁)를 낮추어 제후로 삼아 분릉(山分 陵)으로 옮기게 하고는, 북을 치며 나팔을 부는 이들을 앞세우고 수만군중을 이끌고 도성(都城)에 들어와 북부여(北夫餘)라 칭하였다. 이에 해부루는 분릉의 왕 즉 동부여왕으로 봉해졌는데, 고두막 천왕의 제후에 해당한다. 분릉(..

[홍익인간 280] 북부여(北夫餘) 연대기 5

[홍익인간 280] 북부여(北夫餘) 연대기 52012년 04월 11일 (수) 07:30:55천산(天山) sppopsj@yahoo.co.kr[동명왕 고두막한이 한(漢)나라를 격파하다] 서기전106년 을해년(乙亥年)에 동명왕(東明王) 고두막한(高豆莫汗)이 스스로 장수가 되어 의병(義兵)을 일으켜 격문을 전하니 이르는 곳마다 무적이었으며, 열흘이 못되어 5,000명의 의병이 모여 한(漢)나라 침략군을 연파하였고, 이에 지방의 백성들 모두가 사방에서 일어나 호응함으로써 싸우는 군사를 도와서 크게 떨쳐 보답하였다. 한(漢)나라 도둑들은 싸울 때마다 먼 곳에서 그 모습만 보고도 무너져 흩어져 버리므로,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구려하(九黎河)를 건너 요동(遼東)의 서안평(西安平)에 이르렀으니 바로 옛 고리국(槀離國)의..

[홍익인간 279] 북부여(北夫餘) 연대기 4

[홍익인간 279] 북부여(北夫餘) 연대기 42012년 04월 10일 (화) 07:39:27천산(天山) sppopsj@yahoo.co.kr4. 북부여(北夫餘) 제4대 고우루(高于婁) 천왕(天王)(서기전108년~서기전87년) [고진(高辰)을 고구려후(高句麗侯)로 삼다] 서기전120년 신유년(辛酉年)에 장수를 보내어 우거(右渠)를 토벌하였으나 이로움이 없었다. 고진(高辰)을 발탁하여 서압록(西鴨綠)을 수비토록 하니 병력을 늘리고 많은 성책(城柵)을 설치하여 능히 우거(右渠)를 대비하는 데 공이 있었으므로 승진시켜 고구려후(高句麗侯)로 삼았다. 당시 위씨조선의 3대왕인 우거의 세력이 강했던 것이 되는데, 지금의 요하가 되는 서압록 지역을 고진(高辰)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여 공을 세우니 고구려후로서 제후로 봉한..

[홍익인간 278] 북부여(北夫餘) 연대기 3

[홍익인간 278] 북부여(北夫餘) 연대기 32012년 04월 09일 (월) 07:55:44천산(天山) sppopsj@yahoo.co.kr[위만의 침입에 대비하다] 서기전193년 무신년(戊申年)에 천왕께서 상장(上將) 연타발(延他勃)을 파견하여 평양(平壤)에 성책을 설치하고 도적떼에 대비케 하였다. 위만(衛滿) 역시 싫증을 느꼈던지 다시는 침범치 않았다. 여기 평양(平壤)은 장당경(藏唐京)인 개원(開原) 즉 지금의 심양(瀋陽)의 남쪽에 있던 해성(海城)을 가리키는데, 한반도의 평양은 고구려의 남경(南京)에 해당되며, 단군조선 시대에는 백아강(白牙岡)이라 불리었고 수도의 도성(都城)은 왕검성(王儉城)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아우 고진(高辰)에게 해성(海城)을 수비케 하다] 서기전192년 기유년(己酉年)에..